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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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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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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00:04

어느덧 새정부가 출범한 지도 1년이 되어 갑니다. 작년에 멜로 받았던 글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http://www.sanletter.net/letter/lastview.asp?mailbox_idx=2188

그리고 작년부터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 쇠고기 협상과 촛불 문화재, KBS와 YTN, 일제 고사와 교사 해직, 역사 교과서 수정, 종부세 완화와 4대강 정비 사업, 용산 참사...


p.s. '산마루 서신' 신청하기
http://www.sanletter.net/together/reque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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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지방선거 무렵의 일입니다.
주일 예배 후에 그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 식당에서, 저에게는 좀 당황스럽게 보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운동원인지 후보 본인인지는 모르지만 선거운동 띠를 두른 사람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 장로님은 띠를 두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저를 헷갈리게 했습니다. 개인 차원의 선거 운동인지 아니면 당회원 자격으로서 그분을 안내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입니다. )


그 때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주일에) 선거운동을 해도 되나?
장로님이 안내를 했는데 이것은 당회의 공식 의견일까? ( 집사님이 안내를 했다면 이렇게 당회와의 관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겠죠 )
앞으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교인이 교회에 그 후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면 교회에서는 어떻게 대응할까? ( 막는다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죠 )


현재 한국 기독교 문제점 중의 하나는 교인들이 공과 사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교회 내에서의 대표성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것은 더욱 필요한 덕목입니다. )
다른 분들의 의견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는, 이명박님이 서울 시장으로 있을 때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한 얘기입니다. 장로로서 개인적 신앙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서울시장으로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한국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국가라면 관계 없겠지요 )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열매로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지, 위와 같은 구호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구호'를 많이 외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는 '사랑'이 없기에 '제사'나 '율법'과 같은 형식적인 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김영삼님도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으로부터 눈에 뜨일 만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대통령직을 그만 둔 후의 자취는 더욱더 성령의 열매와는 관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 전쟁에서 첫 승리를 얻은 후에 부하가 '하나님은 우리편이다'라는 말하자, 링컨은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위의 두 장로님들은 링컨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을까요?


미국 대통령은 취임할 때 왼손을 성경 위에 올려 놓고 오른손을 들고 취임 선서를 합니다. 만약 그런 대통령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거리가 먼 정책을 행한다면, 또 그의 행동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면 비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정치가의 행동이 성경과 다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서울'과 '대한민국'을 봉헌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 이런 사람들은 어차피 하나님의 '예정'에 없었으니까 상관없다고 얘기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만... ^^;; )


새로 출범한 정부의 모토 중 하나가 '섬기는 정부'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하고, 이해는 듣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도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더 강조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지난 참여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진 큰 원인이 바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탄핵 정국 후 국민이 지지를 많이 해 주자 그 때부터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말'이 더욱 많아졌지요.


이명박님은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용납으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탈세, 병역비리, 부동산 투기 등의 의혹이 많은 사람들을 내각에 넣었습니다. 대운하를 강행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BBK 또는 자녀의 위장취업으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의 가치관에서 보면 별로 '뭐 그 정도야'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보수)교회가 이런 것에 대해 먼저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정 능력을 잃어 버리고, 이런 모습이 결국 많은 한국 교회의 가치 기준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 분리'의 원칙을 방패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뉴라이트나 북한 반대 등을 보면 이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동은 정치적 의미를 띌 수 밖에 없고 어떤 신념이 나타나는가의 문제일 테니까요.


김영삼님과 이명박님의 '승리'에는 기독교인(장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많은 수의 큰 보수 교회들의 노력이 상당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의가 적용되는 나라를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고지를 점령했다'라는 것에만 만족한 것은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 고질병인 혈연, 지연, 학연에 이어, 종교에 의해 나누어지는 '교연'이 탄생하고 그것이 계속되는 순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 이런 '교연'의 관점에서 보면 황우석님에 대한 불교계의 지지도 이해가 갑니다. )


이재철 목사님의 '매듭짓기'라는 책에 보면 '오늘날 천주교는 순교자 정약종보다 배교자 정약용을 더 위대한 천주교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정약용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정약종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도 이해가 갑니다.

처음 출발에서 너무 벗어나 버렸네요 ^^;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p.s. 이재철 목사님의 '인간의 일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에덴과 아단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곳은 악이 창궐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가난과 질병의 질곡도 아니었다. 그들이 죄를 범한 곳은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부족함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지상의 낙원 속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말았다.
다윗의 상황 또한 동일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왕국이 그에겐 에덴이었다. 그의 명령 한마디에 되지 않는 일이 없었고, 백전백승을 구가하는 그의 군대는 천하무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에덴에서 '아단'(에덴의 재귀 동사, '주색에 빠지다'라는 뜻)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보다 왕궁의 왕좌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을 더 크고 귀하게 여긴 것이다.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어린 나이에 양을 지킬 때, 사울의 칼날을 피해 정처 없이 다닐 때, 그 때 다윗의 영혼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도, 다윗도 그들 인생의 최정점에서, 모두가 부러워할 에덴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아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생의 최절정기에 허망한 욕망을 위해 자기 생명을 깎아 먹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 '생활의 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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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a-n-ds.tistory.com/83 ( 눈에 띄는 책들... )
http://ya-n-ds.tistory.com/5 ( 헌책방-230 )

[초신자를 위한 책 읽기④ 복음의 발견]
복음? 붕어빵의 팥!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5


[초신자를 위한 책읽기(3)|교회의 발견을 돕는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2


[초신자를 위한 책 읽기 ②성경으로 이끄는 도우미]
성경 읽으면 졸리다구요?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1


[초신자를 위한 책 읽기 ①기도를 돕는 책]
책으로 대신할 수 없는 기도, 책으로 읽는다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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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에서 장로님이나 권사님을 뽑는 공동의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여건이 많이 달라지는 것이긴 합니다.

저는 이전에 순복음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직접 선거의 형태로 선출을 하는 ㅅㅊ 교회의 모습이 몹시 새로웠습니다. (이렇게도 뽑을 수 있구나. 하기는 순복음 교회에서 직접 선거의 방식을 따른다면 7부 예배까지 투표를 하고 계수하고 하는 일이 어렵겠지요. 그리고 2/3 득표가 안되면 다시 재투표... ^^;;)

아무튼 장로님, 권사님을 세우기 위한 공동의회가 있을 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어느 분을 적어 내야 할까?'라는 것입니다. 장로님의 경우는 제가 주일학교 일을 하면서 알았던 집사님들 중에 '이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분에게 투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 집사님들의 경우는 제가 주로 일하면서 만나는 분들이 권사 역할을 하기에는 젊은 분들이고 해서 투표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선입견일 수 있죠, 하지만 교회법에 연령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저희 어머니께 여쭈어 보고 공동의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것은 결국 직접 투표의 의미가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 선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사 투표는 기권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선거 형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후보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ㅅㅊ 교회와 같이 교인이 약 1000명 이하인 교회에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나오셔서 자라신 분들은 교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새롭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성도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남녀가 유별(?)하고 세대간으로 나뉘어진 전도회 중심으로 운영될 경우 새신자나 젊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알아 가기가 힘든 거 같습니다. 그 결과 장로님, 권사님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는 ㅅㅊ 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란 성도들이나, 또는 장로님, 권사님이 되실 수 있는 연령대 분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투표라는 목적을 떠나서,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 없이 다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나 교회의 일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 정기적으로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데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데도 도움이 되어, 앞으로 있을 크고 작은 교회의 결정에 좀더 교인들의 생각이 모아질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교인 전체가 교회를 만들어 가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의회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투표 방식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다듬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때, 기독교 동아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방식은 '추천 받은' 후보 중에서 무기명 투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1차 투표에서 2/3를 득표하지 못한 분들 중에 표를 얻은 순서대로 선출 인원의 2배 뽑아 후보로 하여 재투표 하는 공동의회 2차 투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에서 유다를 대신 할 사도를 세울 때 사용했던, 추천 받은 사람들 중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서 만약 제비를 뽑는다면 내가 정말로 그 뽑힌 사람이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고 인정할까, 아니면 '확률'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투표로 대표를 뽑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한 해 동안 동아리를 가장 잘 이끌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투표를 해서 가장 많이 표를 얻는 사람이 대표가 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왜냐하면 동아리의 성격과 후보에 대해 '아는' 성도들이 투표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2차 투표에서는, 후보들의 공약 같은 것을 성도들을 위해서 알려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섬기고 싶습니다', '저는 전도부에서 섬기고 싶습니다', '저는 노인 교실을 부흥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교인들을 돌보는 심방에 힘쓰겠습니다' 등등
그리고, 위와 같은 목표를 위해 그 동안 교회에서 자신이 애써 왔던 일들을 간단하게 적습니다. '초등부 교사와 부장집사로 일했습니다', '전도 폭발 훈련을 받고 새신자 부서에서 섬겼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하면서 노인 교실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등등.
겸손이 미덕인 한국 사람의 성격으로 볼 때 자화자찬의 모습이 될 수도 있어 꺼려지진 하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하면, 그분들의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들이 하셨고 하실 일들을 성도들이 알게 되고, 그것에 맞게 투표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처음 나오신 분들은 '교회에 이런 꿈들이 실현되어야 하구나'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물론 이 '꿈'이 그분들의 모든 모습을 보여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고, 그 교회의 모습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비젼을 가지신 분에게 저의 한 표가 힘과 격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세워진 분들께는 임명식을 할 때 임명장에 그 꿈을 적어 드리고,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기도시간에 그 꿈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겁니다. 선택이 안되셨더라도 성도들은 그분에 대해 좀더 알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 ㅅㅊ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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