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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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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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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00:01

비아메디아 기초과정 후에 마련된 심화과정. 기초과정의 좋은 추억을 생각하며 안내알림 나오자마자 다음주에 바로 신청.
http://ya-n-ds.tistory.com/2888 ( '비아메디아'를 마치며 )
http://ya-n-ds.tistory.com/2923 ( 비아메디아 AS - 강화도 나들이 )
http://ya-n-ds.tistory.com/2927 ( 비아메디아 AS : 성경공부 )

 

10월 21일부터 시작되는 6주간의 여정. 세 과목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종교개혁사, 전례, 아래와 같은 설명과 함께

- 전례와 영성 : 교회력에 따른 영성생활의 실제

- 구약성서신학 : 모세5경에서 배우는 오늘의 신앙

- 성공회 교회사 : 16세기 개혁하는 교회


'뭘 할까? 3개 다? 여유 없이 뭔가 '쫓기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로. 그래 결정했어! '모세오경''
구약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문자적이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현재에 적용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네요, 이전에 읽었던 '팀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두란노)를 통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정의'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었던 것처럼.
http://ya-n-ds.tistory.com/1360

 

토요일 아침 수업이니까, 겸사겸사 아침 7시 감사성찬례를 같이 드릴 수 있어 좋을 듯.

 

첫번째 시간은 제주도 여행 때문에 못 듣고 두번째 시간부터 들어갑니다.
http://ya-n-ds.tistory.com/2935 ( 올레 마무리, 넷째날 - 한라산 : 관음사~성판악 )

 

부교재는 '종교사 입문'(귄터란츠콥스키, 분도). 구약성서 시대의 근동 종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 종교와의 차이점과 비슷한 점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역사 이전 사람들의 역사관을 살펴보고 그것이 종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정착되었는가를 이야기해보는 시간이 유익했습니다.


대부분 다신교였던 그 당시의 종교에서 유일신 사상은 특이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각 영역, 지역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 것이 그 당시(뿐 아니라 요즘도) 사람들에게 좀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제 계급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작용을 했겠지요.
예를 들면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이(B.C. 1353~1336) 아톤을 유일신으로 하는 신앙을 만들고자 했지만 실패로 끝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종교에 물들어 갑니다. 하느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경고하고. 그 당시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장례문화에서 볼 수 있는 부활신앙, 수메르의 길가메쉬 신화,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주위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야훼에 대한 나름의 신앙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대 종교가 정확한 시간이나 공간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대신 (많은 경우) 1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사건(제의)에 의미를 부여하는 '몰역사성' 또는 '신화적인 층'이라는 개념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이 꼭 옛날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사용되는 교회력도 일종의 반복되는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반복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미래를 바라본다는 점이겠죠. 매 주일을 부활절로 경험하는 것이나 하루 단위의 성무일과라는 삶의 형식도, 신화적인 상징을 통해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알쓸신잡 시즌2에서 유현준님이, 대나무를 건축학 관점에서 보면 마디라고 하는 것이 빈 공간의 기둥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디는 단지 물리적인 것에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에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년이라는 마디, 그것을 시작과 끝으로 이어 일생을 살아갑니다.

 

유한한 인간, 시간이라는 한계, 영원과 무한을 바라보는 종교의 영역에서 결국 어느 정도는 신화적이고 몰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게 운명일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난 기초과정에서, 성서에 대한 강의에서 양지우 신부님이 '축자영감설'과 '성서비평'을 모두 넘어서라는 숙제를 주었는데, '신화', '몰역사'라는 (21세기에는 특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개념이 퍼즐의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성공회 신앙의 한 축인 이성은 상식, 초상식, 비상식적인 것을 구별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고, 성서 앞에서의 신앙 고백은 전통과 전례에 의미있는 '신화적인 층'을 쌓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상한' 질문을 하는 몇몇 학생들과, 어떤 설명을 하다가 가끔씩 곁길로 빠지는 박태식 신부님의 케미도 수업시간을 즐겁고 뜨겁게 만든 것 같습니다.

 

토욜 오후 3시에 시작하는 종교개혁 강의. 토욜 오후 시간이 비거나, 그 시간 끝나고 뒷풀이가 있을 때 두세번 정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올초부터 읽었던 '기독교의 역사'(알리스터 맥그라스, 포이에마), 여름 무렵부터 읽은 '성공회 신학'(마크 채프만, 비아), 두 권의 책의 일부를 복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양만호 신부님이 강의를 위해 요약해온 프린트물 덕분에 기억이 좀더 잘 되살아나고(Text orientation인가 봅니다 ㅎ) 또한 책에서는 몇 페이지 지나 멀리 떨어져 있던 내용들이 가까이에 있어 비교와 쉬워 더 잘 이해됩니다.

 

성공회를 출발시켰던 헨리 8세, 그리고 정착시킨 엘리자베스 1세, 둘 모두 독특한 캐릭터와 정치적 수완을 가졌나 봅니다 - '부전여전'?
로마 카톨릭에서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지만 전례 형식은 프로테스탄트보다는 카톨릭을 유지하려고 했던 헨리 8세, 교황의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ㅋ
헨리 8세의 모순된 행동을 보면서, 요즘 '#다스는_누구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장로가카의 가훈이 '정직'이라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요?
수장령을 발표하면서 Head라는 말 대신 Governor를 사용한 엘리자베스 1세, 하지만 Governor라고 쓰고 Head로 행동한 듯 합니다 ^^;

 

하지만 영국의 왕 옆에 있었던 캔터베리 주교들은 그 정치적 상황에서 기도서의 내용과 전례를 다듬는 방향을 이끌며 성공회의 전통과 신학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개신교와 로마카톨릭 신자들이 영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한 것도 어쩌면 일치라는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긍정적으로 봐줄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한 왕의 '욕심'으로 시작한 것 같은데, 개신교 안에 서방교회, 동방교회의 유산을 남겨, 전통과 개혁의 어울림, 신앙의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오늘의 기독교, 그리고 나의 신앙의 한계는 뭘까라는 물음을 던져보는 시간도 갖게 해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교우님이 얘기한 것처럼 12시에 모세오경 수업을 끝내고 오후 3시 종교개혁 수업 하기 전까지 점심 먹고 차마시면서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강좌 못지 않게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서로를 좀더 잘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정이 쌓인 탓인지 저녁 식사와 뒷풀이까지 이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죠 - 그래서 자주 월요일이 더 힘들었고 주말에 잉여 칼로리가 많아졌습니다 ㅋ
중간에 파리로 떠나는 마리아 교우의 환송식, 먼 곳에서 주일 늦은 시간에 와서 축복해 주었던 시간, 비아메디아로 묶여진 사람들이 조금은 가족 느낌이 나네요.

 

주일 오후 3시부터 시작하는 전례 교육. 여기도 주일 저녁 모임이 있을 때면 가끔씩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되었죠. 새신자교육, 비아메디아 기초에 이어 세번째 배우는 교회력. 어느덧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참여한 지 1년, 다시 한번 지나온 시간의 추억들이 교회력 안의 절기와 서로 짝지어지며 머리와 가슴에 새겨집니다.
http://ya-n-ds.tistory.com/2819 ( 교회력 )

 

전례의 형성과 변화에 대해서 배우면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났을 때 그것을 예식에 어떻게 넣고 바꿀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보지' 않고(종교개혁 전에 로마카톨릭에서 라틴어로 미사를 드릴 때는 청중들은 '볼' 수밖에 없었겠죠) '드린'다면(개신교에서 예배 때 모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와 함께 형식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성공회 신학'을 보면 성공회 초기에 로마 카톨릭 전통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전례 형식에 대한 여러 토론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 복장에서 온 듯한 사제들의 옷을 예배 때 입느냐 마느냐, 제대가 필요한가 아닌가, 제대를 돌로 만들어야 하는가 등등... 오랜 논의를 거쳐 고교회, 저교회, 광교회의 전례 형식들로 나타났습니다.

 

약간의 '즉문즉답' 분위기도 있었네요.
- 첫 성공회 예배를 드리면서부터 가졌던 의문 : '사제'라는 말의 의미와 사용
집례자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하는데, 영어로는 'Also be with you' 정도입니다. 굳이 '사제'라는 말을 써야 할까하는 의문.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중 하나인 '만인사제주의'를 성공회가 지지한다면, 사제와 일반 성도를 구별하는 듯한 이 단어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해왔습니다. 언어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가끔씩 성찬례 때 혼자서 '또한 집전자와 함께', '또한 당신과 함께'라는 말로 바꿔 보기도 합니다. 강의 시간에 주낙현 신부님은 '또한 그대와 함께'로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되면 그리스도인의 인사말이 되어 성도가 신부님에게 먼저 '주께서 신부님과(그대와) 함께'라고 하면 신부님이 '또한 교우님과(그대와) 함께'라고 인사를 건넬 수 있겠네요.

 

개신교와 전례 중심의 교회(동방정교회, 로마카톨릭, 성공회 등)의 예배 형식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우려에 대해 한번 짚어보았습니다.
성공회를 보면 '기-승-전-영성체'로 보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전례의 교회가 매일의 경건생활을 위해 마련했던 성무일도를 뼈대로 해서 목회자의 강론이 중심이 되는 '기-승-전-설교'의 구조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예배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이 있을 수 있고, 영성체를 하는 것만으로 미사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성공회 교인이 있을 수 있겠죠.

 

박태식 신부님 시간에 곁가지로, 천주교 또는 성공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당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천주교는 제대 너머 안쪽에 있는 감실(영성체 떡을 보관하는 곳)을 향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네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이 있는 곳이라서. 축성에 의한 성변화를 생각하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요.
성공회는 제대에 있는 십자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체 떡의 성변화가 아닌 성찬할 때 영적 임재의 견해를 따르면, 감실도 없고 결국 십자가라는 예수의 상징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게 논리적으로 맞을 것 같습니다. 신학에 따라서 전례의 모습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간에 영적 임재와 성도의 받아들임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는 실영한 양식이기에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양식이 되시고 반추됨으로써 우리에게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불링거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영적 수용을 강조함으로써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수정하였다. 크랜머는 이 영적 수용과 더불어 성찬례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성찬의 전례에서 떡과 포도주를 들어올리고 내릴 때, 고개를 숙이고 성호를 긋고 하는 것을 꼭 해야할까라는 물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따라하다가 요즘은 고개를 숙이고 들려오는 전례문을 Lectio Divina처럼 묵상하면서 영성체를 준비합니다.
축성 과정에서 언제 예수님(의 몸과 피)이 임하느냐라는 여러 이론 중에 'Great Amen'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냥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고백의 마침표로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2017년 첫 주일부터 참여한 성공회 예배와 이어진 교육들. 여러 의문과 의미를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빈칸들이 메워지고, 이전에 있던 것들이 지워지고 고쳐 쓰였습니다.
http://ya-n-ds.tistory.com/2767 ( '데이트' in 서울주교좌성당 - 성공회 예배 )

 

비아메디아는 나에게 뭘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 '나침반과 바람'이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흔들리며 방향을 가르켰고 흔들어 자라게 해주었으니까요.

 

12월 2일 마지막 강의- 교회력의 마지막날과 겹쳤습니다. 12월 3일 졸업식 - 교회력의 첫날입니다.
마디가 생겼고 그 위에 다시 줄기가 자라겠지요. 그 사이 행복하게 가을을 지나 겨울이 왔습니다. 내년 비아메디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이런 기쁨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Also be with you!"
https://www.facebook.com/thames.young/posts/1531986373535786

 

p.s. 새교우들 소식을 전하는 '복음닷컴(Gospel.Com)'.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싣기 위한 코너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요?
제목은 '나에게 넌?' 그리고 '너'를 '10주 새신자 교육', '감사성찬례', '부활절', '비아메디아', '세례식' 등등으로 바꾸면 아래의 예처럼 되겠네요.
"'비아메디아'는 나에게 **이다.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긴 글을 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성공회에서의 경험을 글로 표현해보면 그 경험들이 좀더 소중하게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p.s. 교회에서 어떤 과정 마치고 나면 항상 해보는 질문. '나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개신교의 '제자 훈련', 성공회의 '비아메디아', 각 교회의 새신자교육, 세례교육, 견진교육... 단순한 코스웍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촉매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p.s. 1년간 성공회와 성경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정리해 보면,
'기독교의 역사'(알리스터 맥그라스, 포이에마)
'성공회 신학'(마크 채프만, 비아)
'종교사 입문'(귄터란츠콥스키, 분도)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까치)
'불국토를 꿈꾼 그들'(정민, 문학의문학)

 

독서 목록에 저장~
http://ya-n-ds.tistory.com/8 ( 헌책방-1△○ )
http://ya-n-ds.tistory.com/5 ( 헌책방-230 )

 

 

※ 생활의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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