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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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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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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13:33

'호모이코노미쿠스' -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물건을 살 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를 최고로 하려는 것이겠죠.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것.
일본을 비하할 때 '경제 동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호모'로 시작되는 용어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네요. 돈버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텐데.

종교에서 '경제적인' 길을 찾는다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죽은 후에 천국, 극락, 낙원 등에 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이런 교리를 가지는 종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리겠죠. 물론 그 종교는 세상이 망가지는 데 일조를 할 거구요.

신광은님은 이 책에서 한국 기독교가 부패, 타락하는 원인으로 잘못된 신학(교리)을 얘기합니다. 책 제목에 쓰인,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편리한 점만 가져온 '아르뱅주의'입니다.

장로교는 칼뱅주의, 감리교는 (웨슬리안)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데 한국 교회, 교단 사이에는 이제 그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네요.
'TULIP'이라고 불리는 칼뱅주의의 구원론은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제대로 가르칠 지 몰라도, 장로교 교회에서는 그것이 변형되어 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TULIP'의 Unconditional Selection(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믿음을 줌으로써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시키는 인간의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택을 인간이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영접하는 기도를 했다고 해도 구원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봐야 아는 겁니다.

반면에 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조건적 선택. 그래서 자기의 고백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삶을 사는 동안 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조건적 견인) 그 '구원'이 평생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봐야 합니다 ^^;

가장 '경제적인' 것은 자유의지로(자기 스스로) 구원(선택)을 확신하고 그 구원이 끝까지 보장되는 것이겠네요.
'TULIP'의 P에 해당하는 Peseverence of Saints(성도의 견인)는 하나님이 선택을 하면 어떻게든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교리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조건적 선택과 칼뱅주의의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각각 선택하면, 구원에 대한 선택과 그것의 지속성에 대한 불안이 사라지는, 신광은님이 표현한 '아르뱅주의'가 나옵니다.
아래표는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굵은 글씨로 표현된 것이 '아르뱅주의'를 위한 조합입니다.

                              선택                  지속성
칼뱅주의                 제한적 선택       성도의 견인   -> 선택에 대한 불안
아르미니우스주의    조건적 선택      조건적 견인   -> 지속성에 대한 불안

세월호 참사 이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구원파는 아르뱅주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ya-n-ds.tistory.com/2084 ( 구원파 )

하지만 글머리에서 얘기한 것처럼 기존의 교회에서도 이 아르뱅주의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알게 모르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해악 중 하나가 소위 '칭의-성화-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에서(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성화'의 과정이 경시되는 것입니다.
http://m.cafe.daum.net/africainmission/AmNs/111?q=%ED%98%84%EC%9E%AC+%ED%95%9C%EA%B5%AD%EA%B5%90%ED%9A%8C+%EA%B5%AC%EC%9B%90 ( 현재 한국교회 구원론은 구원파와 다름 없어, 김세윤박사 )
http://hankookilbo.com/v.aspx?id=5a13753774054a1687c670bac1c70a4a ( 한국교회는 '구원파'와 다른가? )

루터 이후 구원(칭의)의 개인적 체험이 강조되면서부터 '성화'의 자리가 좁아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루터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3세기까지의 초대 교회에서는 신념(Belief), 소속(Belonging), 행동(Behavior)의 변화가 있어야 이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여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http://vofw.tistory.com/12 ( 회심의 공동체 )

하지만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는 '행동'을 뒤로 밀어놓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강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바뀌는 것은 예수님을 주(kyrios)로 여기고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구원(회심)의 열매입니다.
하지만 루터로부터 나온 '칭의', 칼뱅주의로부터 나온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같은 교리가 교회 안에서 (편리한 방향으로)왜곡되어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지게 되어 교회의 도덕성이 세상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위조지폐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 돈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위폐를 봤을 때 이상한 점이 눈에 띄일 테니까요.
이 책을 읽다보면 교회사에서 '구원론'이 어떻게 다듬어지고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리의 '논리적인' 한계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것이 맞는가 성경을 봤던 것처럼, 강단이나 기독교 TV에서 나오는 설교들이 성경과 맞는지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겠네요.

좁은문을 찾는 게 필요한 때입니다. 좁은문을 찾기 어렵다면 최소한 넓은문으로는 들어가지 않아야겠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 마태복음 7:13,14 )


p.s. 이전에 모았던 'TULIP'입니다.
http://ya-n-ds.tistory.com/948

p.s. 글 중에 나온 '칭의-성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 하나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3500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

p.s. 페친 중 하나가, 중학교 다니는 딸과 함께 이 책 내용을 가지고 기독교인의 구원론에 대해, 그리고 잘못된 구원론이 어떻게 도덕적, 윤리적 타락으로 이끌 수 있는 지에 대해 얘기한 것을 담벼락에 올렸습니다.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믿음에 대해 물음표를 가지는 자녀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도 부모님들이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질문하는 버릇이 생겨, 대학교에 가서도 이상한 교리로 유혹하는 동아리에 대해 면역력을 가질 수 있을 것도 같구요.

p.s. 세월호 사고 나서 주일학교 샘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언제라도 천국 갈 수 있게 잘 가르쳐야겠어요" ( 아이들이 이런 샘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으면... ^^ )
그런데, 칼뱅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에서 이 말이 의미가 있을까요? 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주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가까운 감리교에서는 이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이 자유의지로 복음에 반응할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으니까요.

장로교는 다른 교단보다는 좀더 '선민의식' 같은 게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을 더 믿기 때문일까요? 예장합동은, 가장 교세가 크다고 해서인지 스스로 '장자교단'이라고 합니다 ^^;
http://www.mart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 ( "제일 큰 장자 교단 된 것 감사" )
http://ya-n-ds.tistory.com/2223 ( 예장 합동 )
성경에 보면 맏아들 중에 좋지 않은 삶을 산 경우도 많죠. 가인, 에서, 르우벤...
(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교만'이 되었습니다. )

3세기 이전의 교회에서는 '예수는 주', '부활' 같은 핵심 교리를 지키면서 예수를 따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의 자유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단을 막기 위한 논쟁에 그리스 철학의 인식론적 명제가 사용되면서 배타적인 교리가 만들어졌다네요. 하지만 어떤 교단에 속했는지, 어떤 교리를 믿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죠. 말씀에 얼마나 가깝게 살고 있는가? 그 삶이 믿는 것을 드러낼 테니까요.
소모적인 논쟁을 막기 위해서는 일치할 때와 자유할 때의 구분이 필요하겠죠.
http://ya-n-ds.tistory.com/1884 ( 일치, 자유, 사랑 )

p.s. 잘못된 구원론은 교회론에 영향을 주고, 그것은 결국 교회를 만들어가는 잘못된 방법을 낳겠죠.
http://ya-n-ds.tistory.com/1570 (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p.s. 구원론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라고 할 수 있기에, 세월호 사고에 대한 부적적할 얘기를 한 목사님들도 차이는 있겠지만 잘못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http://ya-n-ds.tistory.com/2098 ( 세월호 : 부적절 목사님들 )

※ 생활의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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