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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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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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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00:06

길 위의 신부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vod/1524875_116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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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치의 표리(表裏)]<1> "법원, 너 마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90227095000&Sec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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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푸들'을 좇는 MB…100년을 말아먹으려고?
일제고사 '선배' 영·미 살펴보니…"실패 예견된 정책"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4103637&section=03

안병만 "하나님께 맹세코…" vs 안민석 "장로도 사기치더라"
일제고사 논란 폭발…한나라 "이 정도 사고면 선진국 수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90223172404&section=01

"부족했다…앞으로 잘하겠다" 앵무새 교육감들
교과위에 교육감들 총출동, "일제고사 자체는 문제 없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4115840&section=01


p.s. 일제고사 관련 글들...
http://ya-n-ds.tistory.com/72

AND

2006년 마지막날 교회 홈피에 올렸던 글을 고쳐 입어 봅니다. ^^


예전에 교사로 있었던 영아부에서 자주 하는 찬양 중에 아래와 같은 가사를 가진 곡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인기 순위 Top 5 안에 들어가는 노래이기도 하죠.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배탈 걱정 없죠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 ♪
꿀송이보다 달콤해요 질리지도 않아요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다이어트 걱정없죠 ♬
 
부르면 부를수록 가사가 재미있고 또 제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는 '나에게 성경이 진짜 꿀송이보다 달콤하고 질리지도 않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주 가끔, 꿀송이보다 달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맛을 느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질리지 않는다는 건 좀... ^^;;
그리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 '하긴 저도 하나님 앞에서 계속 자라나는 자녀 중 하나일 테니까, 뭐' 하면서 잠시 위안 ).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아부 아이들은 아직까지 선생님들의 좋은 점만을 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아직까지는 아이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거지요 ^^;; 그러나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선생님과 부모님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들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아부 교사를 하면서 생각했던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학기 초에 나왔던 영아부 교사명단에는 13~14명 정도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일에 평균 8~9명의 선생님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을 때는 여섯 명 정도의 선생님만 나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른 주일학교 부서와는 달리(유치부는 비슷할 지 모르겠지만) 예배를 드린 후에 공과공부를 대신하여 2부 순서로 만들기나 그리기 시간을, 아이들이 그냥 테이블에 마음대로 둘러 앉아서 갖습니다. 이때 선생님들이, 부모님이 영아부에 남지 않고 어른 예배를 드리러 가서 혼자 남아 있는 아이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영아부에서 담임 선생님 제도를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개념이 없기에 책임감이 없어지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굳이 내가 나오지 않아도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의 일은 결국 그 누구의 일도 되지 않을 수 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조절하기 힘들 때 무엇인가 자신을 잡아 줄 수 있는 안전 장치가 필요한 것처럼 '담임'이라는 것은 책임감을 줍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로 영아부에 이 형식을 도입하기 힘들어, 영아부에는 다른 부서보다 좀더 책임감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가 영아부에 가려고 했을 때 '중고등부를 해야지 왜 영아부를 가느냐'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 속에서 '영아부는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 부서의 연령이 낮을수록 누구나가 맡을 수 있다는 편견 또는 선입견은, 교역자들에게 부서를 맡길 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처음 시작하는 전도사님들은 주로 초등부, 좀더 시간이 지나면서 준목님, 목사님이 되면 중고등부, 청년부, 어른예배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 교육의 관점이 아닌 교역자 훈련의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김동호 목사님은 '생사를 건 교회개혁'(규장)에서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담임목사, 부교역자 조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잠시 뒤로 밀어 놓고, 일단 성도 개인이 가진 교회 교육에 대한 틀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보는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물리를 들었는데,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초등학교 과학 선생님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렸을 때 생각하는 법과 개념을 잘 가르쳐 놓으면 교육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ㄱㅇㅈ 전도사님이 잠시 영아부를 도와주셨습니다. 영아부 예배 시작하기 전 교사 모임에서 전도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사님이 2부 예배 성가대에 '임명'되어 영아부를 더 이상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 당회에 대해 많이 실망했고, 허탈감도 들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전도사님의 역할이 주일학교보다 성가대 솔로로 더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전도사님을 주일학교에서 성가대로 옮기지 않았을까요?
 
ㅅㅊ교회의 봉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주일에 너무 바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 저것 해야 할 일이 많은 거죠.
저에게 인원이 부족한 1부 성가대를 해 보라는 말을 가끔씩 들었습니다. 어차피 1부 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로 가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고음불가'이고, 제 파트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파트를 쫓아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 성가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라고 얘기하져. 그런데 더 큰 이유는 시간 때문입니다. 제가 성가대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배 시간 전후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예배 후 연습도 해야 하고, 교제도 해야 하고... 하지만 주일학교와 병행하면 중간에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과의 예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죠. 성가대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교사로서의 역할에 필요한 시간을 놓치게 됩니다. 두 개의 모임이 연달아 있을 때는 어쩔 수없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시간이 이어지는 새신자반과 오후예배 성가대 역시 비슷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영아부는 예배 전에 교사모임을 잘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도 각자 바쁜 일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 남아서 다음주 2부 순서를 준비하게 됩니다. 준비하지 못하는 적도 많죠.
사실 주일을 준비하는 것에는, 주일날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찍 토요일에 잠드는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말 밤의 유혹이 만만하지 않죠 ^^;; ). 아니면 잠이 모자라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휴일의 늦잠, 참을 수 없는 달콤함이져~)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Confuse fruitfulness with busyness'. 번역하자면 '열매 맺는 삶을 바쁜 삶과 혼동한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바쁘게 일을 많이 할 때의 단점은, 집중하지 못하고 일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이 분주한 마르다에게 얘기하신 것처럼 좋은 것 하나만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눅 10:38~42 )
 
주일 학교는 늘 일할 교사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좋지 않았던 기억은 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을 다른 부서로 옮기는 절차에 관한 것입니다. 영아부의 한 선생님 역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ㄱㅈㅎ 장로님이 직접 그 선생님에게 이야기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진행되는 얼마 동안 영아부 담당 지도교사가 몰랐습니다. 제안을 받은 선생님이 영아부에 와서 내용을 이야기한 후에야 안 모양입니다. 물론 교사로서 일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일 수도 있습니다. 또 교육위원회 전체를 맡고 있는 장로님에게 있어서 적절한 교사 배치는 매우 중요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영아부 지도교사인 집사님 역시 선생님을 모아서 내년 영아부를 운영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장로님은 그것을 고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되면 함께 일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순종'이 '강요'되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의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먼저 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근본 원인은 교사수의 부족이고, 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ㅅㅊ교회는 교사를 키우는 것보다는 키워진 사람들이 교사로 일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짜점심'은 없습니다. 물론 공짜점심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설교'와 '강의'가 주를 이루고, '양육' 또는 '제자훈련'은 없기에 ㅅㅊ교회는 '일꾼 키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일꾼으로 자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소수의 사람이기 쉽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론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들이겠지요. 모 대통령이 강조했던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정규 학교 수업시간에만 충실히 해서' 수능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 학생은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개인 또는 소그룹 과외를 하고 좋은 선생님들 찾아다니는 사교육이 성행하는 게 아닐까요.
달라이라마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인도사람들은 흔히 이 지구상의 인구 숫자만큼의 다른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다양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교와 강의를 물건 만들기에 비유하자면 적은 종류를 많이 생산하는 것과 비슷하고, 양육은 많은 종류를 조금씩 만드는 것 또는 수작업에 의한 명품 만들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에 단방향성과 보편성이 주가 되기 쉽고, 후자는 소수의 정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양방향성과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자는 '시간'이라는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와 강의는 크리스쳔으로서의 '동기 부여', 양육은 개인 차이에 따른 '성숙'이라는 목적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이렇게 쓰는 것도 동기부여가 목적이 되겠네여 ). 당연한 얘기겠지만 교회의 '계속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설교, 강의, 양육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기대치가 크면 작을 때보다 그 일의 수준이 올라갑니다 ( 잘 안될 때는 실망도 크겠지요 ^^; ). 성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과 소그룹 리더에 대한 기대치가 클수록 교회는 그에 대한 투자를 좀더 하지 않을까요? 교회 구성원들이,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좋은 선생님들을 키우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어떨까요? 내 아이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과 나를 돌보는 리더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을 내 아이의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 그리고 나의 직장 상사에 대한 기대와 비교하면 어떤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결국 현재 ㅅㅊ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나 강의가 성도들에게 주는 동기부여의 정도를 알려 줄 것입니다.
이런 '교계 상상뉴스'는 어떨까요?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좋은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를 찾아서 교회를 옮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 교단은 지나친 집중을 막고자 각 교회 주일학교에 대한 지원제도를 마련하는데 고심하고 있습니다"
 
2007년 대선의 화두는 '경제'였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강조가 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값비싼 교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 사회가 도덕성이나 약자를 위하는 것과 같은 더 나은 가치를 찾는 과정을 거쳐야겠죠 ^^;;)
장로님과 권사님을 뽑는 공동의회에서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저는 거기에 '교육'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적이 없거나, 목적이 있어도 그분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으면, 결국 선택은 혈연, 지연, 학연, 생활 수준 등의 '보이는 것'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 그 정보가 부정확하다면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겠지요 ). 후보들에 대한 정보 부재, 저에게 공동의회가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입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농업 사회, 산업 사회, 정보 사회라는 과정을 너무 숨가쁘게 경험한, 특히 정보화 사회의 변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은 부모님 세대에게, 사회 변화에 맞는 비젼을 요청하는 것은, 비록 '교회의 리더'로서 일하실 분들에 한정한다 하더라고, 또 다른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닐까? 가끔씩 집에서 부모님과 얘기를 할 때 느끼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언젠가 설교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종종 연애소설을 읽으신다고 얘기한 것이 생각납니다 ( 그런데 무라까미 하루끼도 읽으셨을까? ^^; )
 
가르치거나 본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측정하기 위해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바리새인 지수(Pharisee Quotient : PhQ).
PhQ=100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거나'(마 23:4) 또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눅 6:41) 상태 등 예수님이 지적했던 모습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PhQ=0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PhQ를 시쳇말로 표현하면 '영적 비만도'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신체의 비만도가 기준치를 넘어 높아지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처럼 높은 PhQ는 크리스쳔의 삶에 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개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이 교회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직분을 맡게 되거나 교회에서 봉사를 하게 되면서 점점 익숙해지면 PhQ가 올라가기 쉽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족감을 가져다 주기 시작하고 그것이 계속 쌓이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무디어지고 멀어지기 쉽게 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입니다- 성경공부와 기도. 이것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되겠지요 ( 'Who Who Who 난 누굴까~'로 시작하는 영아부, 유치부 찬양이 떠오르네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 제목이 꼬리를 뭅니다 ^^ )
 
달라이라마는 도올 김용옥님과의 인터뷰 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운명은 내가 승려(monk)라는 사실, 그것 하나입니다. 내가 승려라는 사실은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승려의 계율을 받았고 그 계율을 지키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내가 승려라는 사실을 누구도 나로부터 뺏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 나를 누가 신이라 부르든, 생불이라 부르든,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든지 그러한 것은 모두 그들 자신의 멘탈 프로젝션일 뿐입니다. 나는 여전히 도올선생님과 같은 단순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는 중입니다. 그 이외의 어떠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나의 운명입니다."
'승려'라는 말 대신 '크리스쳔'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 봤습니다.
순복음 교회 대학부 때 선배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형은 교회에서 꿈이 뭐에여?" "좋은 집사"
 
이 글의 길이만큼 PhQ가 올라갔겠죠 ^^;; '운동'하러 가야겠습니다, 좀 오래오래~
( http://www.sanletter.net/letter/lastview.asp?mailbox_idx=2498 )
 
p.s. '생사를 건 교회개혁'은 한국 교회에 대해 많은 문제 제기를 한 책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 http://blog.naver.com/kjyoun24?Redirect=Log&logNo=60029260664
이 책과 여러 반대 의견들을 읽고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p.s.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는 청년들이 한해 동안 나름대로 느꼈던 것을 게시판에 올려 보면 어떨까요? 좀더 나은 주일학교를 위해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보 사회'에 익숙한 청년들이 시작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ㅅㅊ교회 버젼의 '세대공감 Old&New'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대간에 공감하면 가장 좋고, 이해 정도라도 만족하고, 최소한 오해나 편견, 무관심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p.s. 위에서 인용한 달라이라마의 이야기는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3)에 나옵니다.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다가 책 뒤 참고 자료 소개에서 발견한 책입니다. 앞의 두 권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 저도 세번째 책만 읽었습니다. 불교 역사, 불교 미술 등에 대해 맛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p.s. 제가 이전에 썼던 글들을 보면서, 그때와 현재를 비교하며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 공동의회 : http://ya-n-ds.tistory.com/10
☞ 심고 물주고... 자라고 : http://ya-n-ds.tistory.com/25
☞ 새들백 교회 이야기 : http://ya-n-ds.tistory.com/7
외교 정책 때문에 '부시의 애완견'이라고까지 놀림을 받는 영국의 블레어 총리도 처음 총리가 되었을 때 일정 기간마다 자신의 공약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잘 안된 것은 그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 지를 확인했던 리더라고 할 수 있었네요.


※ '생활의 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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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은의 이달의 영화 하나' 전체보기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3

[윤성은의 이달의 영화 하나]‘세 가지 색’ 사랑 법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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