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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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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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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07:21

연말이 가까워 오면 고민에 빠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때는 그 고민이 해를 넘기기도 합니다. 주일학교를 맡으신 부장집사님, 교역자님, 장로님들이십니다. 함께 일할 교사를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6년 정도 ㅅㅊ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하는 동안 이 현상은 계속 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교사가 모자라지 않는 교회도 많을 겁니다 ) -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는 것은 예수님 때부터 계속 있어 온 일 일인가 봅니다. ^^;

예전에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님이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생까지는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교회의 청년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기들을 낳으면 저절로 부흥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중등 과정부터는 상황이 달라셔서, 세상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아 아이들에게 주일학교의 의미가 점점 없어지기 쉽다고 합니다 ( 요즘은 이미 초등학교 5,6학년에서도 많이 나타나지 않나요 ^^;; ).
그러면서 이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멋진 크리스천 모델'로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즉 삼일교회는 나이차가 많지 않은 청년부의 형, 누나들이 아이들에게 크리스천으로서의 꿈을 그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 교회 리더의 비전이며 의지입니다.
이 '모델론'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아이들에게 그들의 눈높이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눈높이, 코드가 맞는다면 어느 정도의 나이차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40대의 어느 집사님이 20년 정도 차이가 나는 몇몇 청년부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라든가, 주일학교 초등부에서 섬기는 40대 이상의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들이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운동이나 여행, 만화 등을 통해서 친해지고 그 과정에서 말씀과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다양합니다. 제가 자랄 때보다 관심의 폭이 훨씬 넓습니다. 주로 장래 희망과 관련해서 요리, 자동차, 컴퓨터 등등. 그렇다면 주일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 꿈의 변화를 기록하여 윗 부서로 올려 보내고, 교회는 어른들이 가진 달란트를 자료로 만들어 그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의 '중매자' 역할을 하면 좋을 겁니다. 일종의 '수호천사' 또는 '서포터'가 되는 것이지요. 특히 진로 선택을 해야 하는 고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정보 제공뿐만 아니라 기도의 후원자가 있어서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이웃이 되어 세대간의 벽을 없애고 소위 말하는 교회 내 네트워크를 형성되는 데도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것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형식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은 것은 결국 오해를 일으키고 '도움'이 아니라 '잔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어른들도 같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는 출발점은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아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헤아려지는 사랑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조건은(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줄 수 있느냐 일겁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한 교사가 맡을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7~8명 정도입니다. 주 중에 멜이라도 하나 보내고 주일에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아무튼 그 이상이 되면 마음만 바쁘고 형식적이 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비교적 잘 나오는 아이들 중심으로 반을 꾸려 가게 됩니다(학교에서 모범생들 중심으로 선생님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인지 저희 반은 출석부에 있는 인원과 평균 출석 인원이 많이 차이가 납니다. 재적 인원이 10명을 넘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들이 친구를 데려 오면 기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가요? 저만의 문제인가요? ^^; )
이상적으로는, 한 선생님이 출석률이 좋은 3~4명과 교회에 잘 나오지 못하는 아이 3~4명을 맡아 후자의 아이들이 교회에 정착할 수 있게 하면서 전체 아이들이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무 심는 것보다 가꾸는 게 더 중요하고 힘들다고 하지요. 결국 교사 pool이 필요하고 이것은 교육위원회와 당회가 우선 순위를 가지고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주일 지키기가 많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시험 기간에 아이들 출석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학원 보충이 주일 예배 시간과 겹치는 경우 아이들이 학원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과 얘기를 해 보면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공부를 위해서라면 다른 것들은 미루거나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이들에게 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은사와 달란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해서는 '공부에 대한 달란트'만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돌잡이에서 아이들이 돈을 잡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 아이들 자신은 사라져 버리고 어른들의 생각만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머리가 길다는 지적을 받고 화가 나서 머리를 아예 밀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제 친구 중 하나가 공부를 해 볼 생각으로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한 선생님의 반응이 재미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는 오히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느냐고 하시고, 친구에게는 '반항하냐?'라는 식으로 대하더군요 ^^; 아마 밖으로 드러나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차이를 가지고 선생님이 그런 판단을 한 모양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가요? 교회 어른들이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은연 중에 '범생'과 '문제아'를 차별하지는 않나요?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잠시 옆길로 빠졌는데 다시 주일 지키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일주일 세 시간 정도가 성적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12시간 정도라고 하면, (3시간/(12시간x7일))x100=3.6%가 됩니다. 성적이 시간에 비례한다고 하면(사실 일정 시간 이상에서는 더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100점을 기준으로 3.6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하긴 시험 직전의 시간은 그 평상시의 몇 배의 효과가 날 수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네요 ^^;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장기적인 성적 향상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
이렇기에 주일학교 교육에 병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믿음을 심고 물 줄 부모님들에 대한 교육입니다. 결국 학원이 교회와 경쟁하는 현상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에 의한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두려움' 또한 믿음 안에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 제가 아직 학부모가 아니라서 않아서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하지만 부모님과 학생에게, 주일 예배를 빠짐으로써 잃는 것과 얻는 것 중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교회는 고민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찰(코 앞에 있는 시험 점수)'과 '어음(먼 장래에 받을 것)'의 차이로 와 닿는 것이므로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재테크에서 '장기 투자'를 강조하듯이, 교회를 통한 '전인 교육'이라는 인생의 장기 투자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이 설교에서, 위와 같이 청소년들이 주일에도 학원으로밖에 갈 수 없는 위기 상황을 얘기하면서 부모님들이 먼저 아이들이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선 순위를 알려 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아이들을 교회로 보내라고 얘기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커다란 부담감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학원이나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도움이 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 주일 학교가 그들의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담임 목사님 한 분만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학생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 동역자인 교사들과 부교역자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가 좋은 선생님들을 길러 내는 데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교회에 오는 것 자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긴 과거에는 교회에만 와도 바르게 자랄 확률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죠.

아이들이 자랄 수 있게 심고 물 주는 것은 결국 교역자님과 선생님과 부모님이 어우러져서 할 일입니다. 물론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역자, 교사, 부모라는 세 청지기와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해 교회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를 통해서 주일학교와 그 교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조카가 어른들을 따라 흉내내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웃습니다. 그런데 문득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과 앞으로 내가 조카가 보기에 '멋진 크리스천' 삼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 아이들의 모습에는 바로 그 교회 어른들의 모습이 나타날 겁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심으면 말씀 공부하는 아이들로 자랄 것이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물주면 기도하는 아이들로, (차별 없이) 이웃에게 사랑을 주는 모습으로 심으면 아이들도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아이들 눈치가 대단히 빠르잖아요? 주일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교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교회 어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조직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험이나 면접을 통해 '강한 자'를 뽑은 후에도, 그들을 더 나은 인재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마련합니다. 교회 역시 나름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경쟁력 중 하나는 '연약한 자'들이 설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은 더 어려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미련한' 전도를 통해 '약한 자'를 부르고, 섬김의 모범을 통해 '약해 보이지만 강한 자'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이'가 계시기 때문에 사랑의 수고로 오래 참으면 그 결과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광고 Copy 중에 '난 소중하니까요(Because I'm worth it)'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문구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사람들은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높은 하늘아래 수많은 건물 나 발 디딜 자리조차 없네요. 무심하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힘이 들어요~...'라고 얘기하며 삶 속에서 점점 작아지며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은 교회에 올 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이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경고하는 일에 부름을 받은 탁지원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단에 들어갔다 나온 어떤 청년이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소장님, 교회에서 있다 보면 예전에 있던 곳이 그리워질 때가 많아요' 아마 교회에서 외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이 외쳐지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어떤 테두리 안에서만 나눠지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총신대 신학 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시는 김지찬님의 강의에서는 이것을 '요새 멘탈리티'(Fortress mentality)라고 표현하더군요. 가인의 시대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바벨탑으로 이어지고, 이스라엘 말기에는 오늘날의 양극화와 같은 일들이 나타나고(희년도 지켜지지 않았겠죠), 초대 교회에서는 야고보과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차별이 생기는 것처럼 공동체가 하나님과 멀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지 못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이 올바르지 못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욕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물질주의와 권위주의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있는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불하고 사신 '예수님짜리'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빚진 자'로서 먼저 교회에 온 우리들이 그들에게 희미하나마 보여 줄 수 있길 기대하실 겁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오면 기뻐합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더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심고 물주는 사이에 우리의 이웃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좀더 자라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은 '흐믓 x 므흣'이지 않을까요?


p.s. 사랑의 교회에서 봄과 가을에 교사 훈련원을 엽니다. 강의를 들었다고 해결책이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겁니다. 저도 요즘 듣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많이 와서 듣습니다. 아래 사이트 참고하세요.
http://teacher.sarang.org/frameindex.asp


p.s. 헨리 나우엔의 '영혼의 양식'에서 두 꼭지를 소개합니다.
* 새처럼 연약한 것 Vulnerable, Like a Bird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작은 새처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연약함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생명은 돌보아 주기를 원하고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바라며, 지도해 주며 그리고 지지해 주길 바랍니다. 삶과 죽음은 연약함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와 죽음이 임박한 노인 모두 우리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들이 강하고 성공과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생명의 소중함과 그 연약함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 우리의 지식을 자유로이 나누어 가지기 Sharing Freely Our Knowledge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조차 주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말해 달라고 요청할 때, 더 이상 말할 게 없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고 숨으려 하고 소유하려 들며,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나가기를 꺼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요청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자유스럽게 그들과 나누어 가질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우물을 관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얼마나 그 지식의 우물이 깊은 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 '생활의 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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