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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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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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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16:09

미국에 이은 세계의 두번째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 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서구와 전혀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의 전망을 보여주네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진, 서구식 보편주의(?)에 근거한 질서와는 다른 다체제 질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미국, 유럽연합, 중국, 인도, 아세안... )

특히,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비교할 만한, 세계의 중심이라는 문화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중화사상'이 중국인과 그 사회에 나타나는 모습을 연결한 부분이 남다르네요.
다른 나라의 제도에 대해, 어떤 고정된 가치관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겠네요. 물론 이것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미래'(에이미 추아,비아북)와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

우리나라의 외교와, 중국의 실리를 챙기는 외교 전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네요.
http://ya-n-ds.tistory.com/tag/외교1.0

블로거의 밑줄 긋기...
http://soocut.blog.me/10100342802
http://oklawyer.blog.me/90104844351


☞ 책 뜯어먹기 ^^;

** 중국의 민주주의 전망에 대한 서구식 계산 (297쪽~ )
유럽인들의 생각 : 민주주의 = 보통선거 + 다당제 + ...

'이라크처럼 민주주의가 외부로부터 이식된 경우(이라크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무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편익보다 이러한 이식에 따르는 희생(예를 들어, 저항, 소외, 인종적 갈등)이 훨씬 더 클 가능성이 있다'
'민주주의를 역사적, 문화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추상적인 이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며 때로는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정부를 평가할 때 민주화 수준을 다른 기준보다 중요시해서는 안된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며(다인종 사회의 경우 인종적으로 조화를 유지하고)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능력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역사와 개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가 다르면 사회가 처한 상황이나 역사, 개발의 수준에 따라 우선순위도 달라지는 법이다.'

경제 도약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 국가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흔한 통치 형태는 절대왕정과 입헌군주제였다...
선진국에서 투표권은 산업혁명을 달성한 이후로도 오래도록 일부 소수의 특권층에만 부여되었다.(백인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던 미국은 가장 특수한 사례다.)
또 유럽의 권력자들은 피식민지 주민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 대부분 2차 대전 이후에야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수 있었다.

## 영국 : 산업혁명 - 18C후반~19C 초반
~1850년 : 투표권은 남성의 ~20%
~1880년대 : 대부분의 남성에게 투표권
~1918년 : 30세가 넘는 여성에서 투표권 ( 산업혁명이 시작된지 ~130년 후 )

## 미국
~1920년 : 여성에게 투표권
~1965년 : 흑인들은 대부분 투표권이 없었슴

## 일본 :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 도약을 달성하고 나고도 한참 뒤인 1925년이 되어서야 보통 선거가 이루어짐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경제도약 단계 사이에 비슷한 패턴이 관찰되었다.
한국과 대만에서는 군부독재정권이 지배했고, 홍콩은 민주주의와는 무관한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이면서 억지스러운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국가들은 모두 효율적이고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는 행정기구가 있었다. 또 발전의 과정에 있는 국가로서 정부의 합법성은 주로 국민의 권력 위임이 아니라 가파른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1997년 이후 중국의 통치를 받는 홍콩은 매우 한정된 민주주의를 영위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는 여전히 권위적인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다. 반면, 한국과 대만은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다당제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과 함께 산업화와 경제번영이 민주주의 발전에 바람직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중국 정치 전문가 브루스 길리는 러시아는 이미 민주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에 최소한 장기적으로 중국보다 더 부유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가파른 경제 성장과 러시아의 다소 불안한 민주주의를 비교하면,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의 선에서 말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중국의) 경제 수준이 높은 일부 성들(특히 동부와 남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성들)은 이미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여건이 되어 있지만, 중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경제 수준이 낮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은 한계가 있다. 선전과 상하이처럼 개발이 이루어진 도시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먼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쉬쭝헝 선전 시장은 조만간 시 위원회 위원의 70%가 직접 선거로 선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는 2010년 홍콩 행정 장관을 직접 선거로 선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인종주의 현실을 부정하는 중국 (334쪽~ )
중국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서구 사회에 사는 중국인들이 인종 차별을 받고 있으며, 중국 사회는 이러한 인종주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1988년 당시 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趙紫陽)은 중국의 내적통합을 주제로 한 어느 회의에서 "인종차별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흔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홍콩 공동체조직협회가 홍콩에 거주하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3 가량이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피부색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있었다.
또 거의 같은 비율의 사람들이 아파트를 임대하려고 했을 때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가장 흔한 예는 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여성들인 외국인 가정부들로, 주인인 중국인들을 위해 저임금에 자유 시간이 별로 주어지지 않는 가혹한 조건에서 장시간 동안 일을 해야 했다...

홍콩에 대한 영국의 식민 지배 - 1차 아편 전쟁 이후;
1974년까지 오직 영어만이 공식 언어
1902년부터 중국인들은 고급 주거지인 피크(The Peak)에 사는 것이 금지
1897년까지 야간에는 통행증을 소지한 중국인만 이동을 허가하는 법
1970년대 후반까지 중국인들은 고위 공직자로 임명될 수 없었슴. 부서에 따라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법의 적용을 받음
=> 1994년 영국은 뻔뻔스럽게도 홍콩에서 인종차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

(중국 인종주의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2000년 홍콩의 한 병원에서 인종차별적 대우를 받은 데 대해 항의한 인도계 말레이시아인 하린더 베리아가 사망한 이후, 홍콩 특별 행정구 정부는 인종 차별이 심각한 문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리아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2008년에는 뒤늦게나마 인종차별 반대법을 처음 시행했다. 그러나 세계화되고 국제화된 도시 홍콩은 본질적으로 두 인종이 특권을 누리는 곳이다. 중국인과 백인이 특권을 누리고, 피부색이 더 어두운 사람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이류 시민으로 살거나 이주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의 인종주의는 어떨까? 중국인들과 중국 정부는 자국 내에 인종주의가 있음을 부정한다... 중국 사회에서 인종주의자들의 태도는 비정상적이라거나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흑인 중국학자 두존 존슨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사회에서 인종이나 인종주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을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인종주의가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은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국인들 사이에서 인종주의 문제가 언급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은 열등한 존재라는 명백한 사실을 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의 심리에는 인종적 서열이 분명하고 자리 잡고 있다. 백인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반면,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은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 피부색이 검으면 검을수록 경멸감은 더욱 커진다.

중국에서는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을 차별해 온 내력이 오래다.
1988년 12월 난징의 허하이 대학 : 3천 명이 넘는 중국 학생들이 아프리카 학생들을 추방하자는 시위. 상하이와 베이징을 비롯해 여러 지역으로 번짐. 정부 당국은 며칠째 계속되는 시위를 중단시키거나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음.
1979년, 1980년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
1979년, 1980년, 1988년, 1989년 난징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7년, 1988년, 1989년 베이징
2007년 9월 베이징의 나이트 클럽 : 최소 20명의 흑인이 검정 낙하복을 입은 경찰에 체포되어 심하게 두들겨 맞음

왕사요둥은 1980년대에는 "중국 문화를 열등하게 보고 중국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보는 '역(逆)인종 차별'같은 이상 상태를 겪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중국 지식인들이 미국 문화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중국 문화를 하찮게 생각했다면서 중국 민족주의의 등장은 그러한 이상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는 건전한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사요둥은 1980년대의 '역인종차별'을 히틀러의 인종우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매우 색다른 것이거나 나치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 민족적, 문화적 우월감이 중화사상을 만든다 ( 347쪽~ )
중국의 민족적 경험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다. 중국 본토에는 다양한 민족이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다. 소수 민족 인구를 다 합치면 1억 5000만명이나 되지만 중국 전체 인구의 9%에도 못 미친다.
왕샤오둥은 "중국인들의 기원이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인의 95%는 자신들이 같은 민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황핑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 본토에서 한족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은 다른 소수 민족을 굴복시키거나 그들의 민족적 특성을 소멸시키는 과정(즉, 중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족은 소수 민족의 민족적 특징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민족적 다양성을 경시하거나 무시했다. 다시 말해, 한족은 소수 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인정하지 않고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관심이 없었다.
...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전설의 제왕 황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지만 다른 나라의 형성 과정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로 작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 황핑은 "한족이 자신들을 한 민족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인도인과 아프리카 사람처럼 상이한 민족을 똑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 그래서 중국인들은 인종과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복잡한 위계질서에 입각해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이러한 위계질서의 맨 위에는 중국이 있고(마오쩌둥 시대에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는 백인이 있으며 맨 아래에는 흑인이 자리할 것이다.

중국인의 또 다른 특징으로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에서 비롯된 엄청난 자신감을 주목할 만한다.
... 아시아 문화 이론가 천관싱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보편적 국수주의는 한족에게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고 견뎌낼 수 있는 심리적 기제를 제공했다. 당시 중국인들의 생각은 이랬다. "백인 악마들이 무려으로 우리를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정신은 제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은 변방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을 상대로 제국주의자들과 비슷한 인종 차별을 하고 있었다. 한족은 자기 방어를 위해 끝이 날카로운 방패를 사용했지만 이것이 소수 민족을 죽이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야말로 중국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믿으며, 지난 2세기의 역사는 정상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세기 중국의 지도자들은 식민 지배를 받던 굴욕의 역사를 극복하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역사적 책무로 생각했다.
... 중국의 국제 관계 전문과 엔쉐퉁은 이러한 중국의 복원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쇠퇴된 중국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의 부상을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다 ( 363쪽~ )
개혁.개방을 추진한 지 거의 10년이 넘은 1990년 초반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로부터 이어진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 상태. 텐안먼 사건을 진압한 이후에는 여건이 한층 더 악화.
중국이 한국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브루나이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도 겨우 1990년 초반
1990년대 말부터 달라진 중국의 행보 ;
- 1994년 : 상하이 파이브(Shanghai Five) -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 러시아와 우호를 다지고 북서지역 국경 문제 해결
- 2001년 :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 = 상하이 파이브 + 우즈베키스탄
  =>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 증진  /  이슬람 극단 주의자들과 맞서 공동 보조  /  중앙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공동 대응
  => 인도, 이란, 파키스탄, 몽골, 아프가니스탄이 옵저버로 참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
1997~1998년 한국과 동남아시아 지역 경제를 황폐하게 만든 경제 위기를 계기로 중국은 이 지역 국가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지역 국가들은 미국과 IMF가 내놓은 경제 위기 해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중국이 이 국가들의 경제에 고통을 주게 될 위안화 평가절하를 자제하고 경제 원조와 무이자 차관 제공을 제안하자, 중국이 갑자기 의혹의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말레이지아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는 1999년 이런 말을 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중국이 보여 준 모습은 칭찬할 만했다...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었던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의 협조와 책임 정신으로 구원받았다."
중국이 다자간 상호 자유무역주의를 받아들인 사실 말고도 이를 추진하는 방법도 놀라웠다. 당대(唐代)부터 마오쩌둥 시대까지 중국은 우월감을 가지고 냉담한 자세로 주변국가들을 상대했다.
그러던 중국이 동아시아의 약소국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아세안과 협력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바라는 조건보다는 아세안이 바라는 조건을 존중하면서. 중국은 겸손이라는 새롭고도 익숙하지 않은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

1997년~2001년 : 중국 아세안 정상회의('아세안+1') - 2010년까지 중국과 아세안 국가 간의 자유 무역지대를 조성할 것을 제안
2003년 : 중국 아세안 정상회의 - 중국이, 아세안 국가들이 상호 인준한 우호협력조약을 공식적으로 인정 => 중국이 아세안 1967 헌장의 핵심 내용을 수행할 것임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것
2002년 :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를 위한 행동 선언 => 난사 군도, 시사 군도의 영유권 분쟁에 무력 사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천명

2003년 : '아세안 + 3(중국,일본,한국)' 정상회의 - 원자바오 총리는 동아시아 자유 무역 지대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여 채택
2005년 : 일본이 중국의 뒤를 따라 아세안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협상을 진행 -> 2007년 구체적인 윤곽에 대한 합의
2009년 : 호주와 뉴질랜드가 아세안 국가들과의 자유 무역 협정을 추진하기 위한 회담을 가짐

1990년대 중반에 미국은 APEC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먼 추억이 되었다. 중국의 제안으로 2000년 합의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 CMI)를 조성할 때도 미국이 배제되는 현상이 드러났다.
동아시아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 아세안이 도화지를 제공했다고 한다면, 실제 그림을 그린 것은 중국의 외교력이었다. 점점 강해지는 중국의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다.
정치 논리에 따라 경제 통합이 진행되는 유럽 연합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경제가 변화를 이끌어 내고 정치는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중국의 전략을 입안한 전문과 장윈링과 탕스핑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의 시장이 되고, 투자국 및 기술 이전국이 되어 지역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전략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아세안 국가들에게 중국 시장은 일본 시장보다 세 배 정도 크다. 중국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이제 없다.

** 중국에 매력을 느끼는 아프리카 ( 424쪽~ )
중국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명백하다. 경제 성장에 막대한 양의 원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3년 세계 전체에서 중국의 원자재 소비량 ; 원유(7%), 알루미늄(25%), 철강(27%), 철광석(30%), 석탄(31%), 시멘트(40%)

미국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중동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미국에게 상대적으로 등한시되는 곳이다.
2006년 :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아프리카 국가 순방 
2006년 11월 :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 - 아프리카 48개국 정상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 참석
=> 원자바오 총리 : 중국과 아프리카 간의 무역량을 2005년 기준으로 2010년까지 두 배로 늘릴 것을 제안
=> 아프리카 지원 금액을 2006년을 기준으로 2009년까지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약속. 중국-아프리카 발전 기금을 50억 달러를 조성해 중국 기업의 아프리카 투자를 확대하고 지원.
=> 개발 수준이 낮은 국가에 대해서, 아프리카산 무관세 상품 수를 190개에서 440여개로 확대
=> 향후 3년간 30억 달러의 우대 차관과 20억 달러의 우대신용대출 제공
=> 채무에 시달리고 개발 수준이 매우 낮은 국가에 대해서는 2005년 말 만기인 무이자 차관 형태의 부채를 전액 탕감
=> 3년 동안 15,000명의 아프리카 인재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 100명의 농업 전문가를 아프리카에 파견.
=> 병원 30개, 학교 100개. 중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 아프리카 학생 수를 한해 2000명에서 2009년까지 4000명으로 늘림.
=> 계약 성사 : 알루미늄 공장 건설 프로젝트(이집트), 구리 개발 프로젝트(잠비아), 광산 거래(남아프리카 공화국)

중국의 최대 원유공급국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앙골라로 바뀌었다. 중국은 석유를 얻기 위해 알제리, 앙골라, 차드, 수단, 적도, 기니, 콩고, 나이지리아로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앙골라, 수단, 나이지리아 등의 사하라 이남 지역에 대한 석유 탐사권을 확보해 놓았다. 이제 중국은 원유 수입량의 31%를 아프리카에서 들여온다.

지금까지 중국이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이었다...
중국이 무역과 원조, 투자와 관련해 아프리카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더 이상 서구 국가나 IMF, 세계은행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장 극적인 사례로, 2007년 앙골라가 중국에서 좋은 조건으로 차관을 도입하면서 IMF와의 협상을 중단해 버린 적이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아프리카는 세계 경제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다.

중국의 지원은 도로나 철도, 공공건물의 건설뿐 아니라 기술 전문가의 파견까지 포함된 패키지 형태의 지원이었다.(이제 반해, 서구의 투자는 석유와 기타 원재료 개발에만 집중되고 인프라 개발과는 별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중국의 지원은 서구 국가 혹은 국제기구와는 달리 부대조건이 별로 없었다. 또 서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정치적인 조건을 부과하려 했지만 중국은 이와 달리 아프리카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려고 했다. 이것은 국제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며, 중국이 이러한 원칙을 준수하는 것은 '굴욕의 세기'를 경험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2006년 4월 후진타오 국가 주석은 나이지리아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고 자국의 상황에 걸맞는 개발이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중국이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현보다는 정부의 강력한 역할을 중시하는 중국식 모델은 아프리카의 권위주의 정부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다. 국가의 경제적 성공이 관건인 개발도상국들의 세계에서는 중국식 통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중국의 국제관계 전문가 장웨이웨이는 중국식 모델이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선, 중국식 모델은 워싱턴 컨센서스와는 달리 급격한 충격요법이나 급진적 변화에 반대하며, 오히려 기존의 기관을 통해해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는 곧 개혁과정을 이끌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암시다.
중국신 모델은 순차적이면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경제 개혁을 먼저 추진하고 정치 개혁은 나중에 한다든지, 해안 지방의 개혁을 먼저 추진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게 전개될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프리카 국가들로서는 이 관계의 핵심에 본질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요소다. 중국 경제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발전되어 있다...
더욱이 중국과 아프리카의 경제적 격차는 빠른 속도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산업화에 기반을 둔 경제 개발은 달성하지 못하고 다양한 이유로 단지 원재료 공급자라는 한정된 역할에 그칠 위험이 있다.
2005년 베이징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서 남아프리카 국제관계연구소 부소장 모엘레치 음베티는 이러한 두려움을 표명했다.
'아프리카는 원재료를 중국에 팔고 중국은 소비재 상품을 아프리카에 판다. 이러한 관계는 과거 아프리카와 식민지 열강의 관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중국이 치밀하게 작성한 포괄적인 전략으로 아프리카에 접근하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는 중국에 대한 생각이 국가별로 다르다.
중국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국의 진출에 대한 불안과 우려 또한 제기되었다.
2006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자는 '이제 잠비아는 중국의 성으로, 아니 자치구가 되어 가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유권자의 29%에 달하는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당시 중국 대사는 야당 후보자가 당선될 경우 중국은 투자를 철회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중국 기업들이 현지인을 고용하지 않고 중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다. 중국인의 비율이 70%에 달하는 기업도 있었으며, 중국인 관리자들이 현지인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불만도 많이 나왔다.

또 중국이 정치적 지배를 위한 조건을 달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권 문제에 눈을 감아버리겠다는 의미라는 견해가 서구 세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은 중국이 아프리카에 제시하는 조건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중국은 과거 서구 국가들처럼 역사적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은 15세기에 정화가 동아프리카를 원정했을 때 서구와는 달리 영토를 차지하거나 노예를 확보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은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든든한 지원자였다는 점이다.

** 떠오르는 강대국과 쇠퇴하는 강대국 ( 457쪽~ )
미국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중국과 구소련은 매우 달랐다. 구소련은 서방 세계를 적으로 규정하고 독재 정치와 고립주의를 택했지만, 중국은 1972년 이후 서방을 친교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1978년 이후에는 통합과 상호 의존을 선택했다.
구소련은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제로섬 관계를 유지한 반면, 중국은 경제 성장에 가장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친교와 협력관계를 추구했다. 그 결과 구소련은 군사비 지출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국은 1980~1990년대에 GDP 대비 군사비 비중을 꾸준하게 줄여나가 1950~1980년에는 6.35%였던 것이 1980년대에 2.3%, 1990년대 1.4%로 줄었다.
중국의 전략은 덩샤오핑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진지하게 경제개발을 추진하자. 우리의 입장을 견지하자.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침착하게 대처하자. 우리의 역량을 모두 다 드러내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개인적 야심을 버리자. 지도자에 대해 불평하지 말자"

미국은 1990년대 중국을 보며 세계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서구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닮고자 노력하던 모습은 서구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승리를 보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시는 1999년 11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경제적 자유는 행동의 자유를 낳고, 행동의 자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낳는다... 중국과는 자유 무역을 해야 한다.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다."
또 미국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중국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세계화가 언론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작가 제임스 만의 "중국은 필연적으로 미국처럼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은 자명한 사실처럼 비치기도 한다.
지금도 이러한 견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미국인들이 실현될 수 없는 것에 지나친 기대를 하게 만들어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 세계화의 핵심에는 이렇게 심각하게 왜곡된 세계화 개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크게 변화할 조짐을 보여 주는 사건이 둘 있었다.
첫째, 부시 행정부는 다자간 합의에 원칙을 두던 이전까지의 대외 정책을 버리고 일방적 외교 정책을 추진했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원칙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보편주의를 옹호하던 기존의 자세를 버리고 동맹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를 택했다...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러한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난 일이었다... 결국 대다수 국민국가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고, 여론 조사에서도 대다수가 압도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둘째, 2003~2005년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미국의 전략 변화와 중국의 본격적인 등장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나면서 두 가지 사건이 몰고 오는 파장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중국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고, 미국이 생각한 만큼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인식도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2007년 여름에 신용 경색이 시작되고 1년 뒤에 금융 시장이 붕괴되자 미국에서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분위기가 더욱 강해졌다. 리먼브라더스 같은 걸출한 금융회사들이 파산했으며 겨우 살아남은 몇 안되는 투자 은행들도 더 이상 과거의 영화를 누릴 수없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위기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대규모 구제 금융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197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간판격이었던 신자유주의자들의 규제 철폐 정책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영미식 모델이 불과 몇 주만에 안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서구 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지금까지 미국이 분에 넘치게 잘살았다는 (또 그러기 위해 중국이 제공하는 신용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은 미국 경제가 그만큼 취약하며 세계 경제의 중심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이미 갈등은 시작되었다 ( 464쪽~ )
그 동안 중국은 과거 냉전 시대에 체제 간 경쟁을 벌일 때와는 아주 다른 신중한 모습으로 서서히 미국의 대안이 되는 모델로 떠올랐다. 2003년 이후 하드 파워를 강조하던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인기를 잃어가자 중국은 그 빈틈을 파고들어 주로 다자주의를 내세우면서 평화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또 중국은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을 설득하려고 했다. 즉 개발도상국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원조하고 인프라를 지원하면서도 개발도상국의 주권을 존중했다. 또 선진국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국제 사회에서 모든 나라가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식 소프트 파워가 국민국가 '내'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중국은 국민국가'끼리'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이것은 세계 체계 '내'의 민주주의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와 이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 기구를 비판하자 개발도상국들이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 동안 국제기구는 대표성이 없으며 문제점이 많다고 생각한 개발도상국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이 자신의 성장 사례와 경험을 개발도상국과 함께 나누려고 했던 것이 주효했다. 이것은 선진국의 좌장의 위치에 있는 미국에게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 국제 경제 질서의 미래 ( 472쪽~ )
1914년 이전 : 영국은 금본위 제도를 실시하면서 세계 각국에 이 제도를 도입하라고 압박
1,2차 세계대전 사이 : 영국의 힘이 약해져 시장과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파편화된 체계로 바뀜
1945년 이후 :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이끌어감 - 당시 세계 GDP의 1/3을 미국 경제가 생산
2001년 : 중국의 WTO 가입으로 브레턴우즈 체제가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체제로 움직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위기 후 IMF에 대한 대응으로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이 제안됨
-> 만약 동아시아에서 과거와 같은 경제 위기가 또다시 일어난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전과는 달리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금융 구제 방안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IMF는 자금 대여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제는 IMF와 세계 은행의 자금 대여액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중국의 국부 펀드가 신흥 시장에 대여해 주고 있어 마치 세계 은행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WTO는 도하 라운드의 실패와(중국과 인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양자간 무역 협정에 대한 선호 때문에 무역 자유화가 크게 유행하던 10년 전에 비해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또  다른 경제기구라고 할 수 있는 G8(G7+러시아)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국제 경제 기구가 점점 역할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알수 있다. 이상하게도 중국은 G8 회원국이 아니다. 따라서 G8이 세계 경제의 대표성을 띠지 못하게 되자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2008년 가을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 불황을 맞이하면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 즉 G8의 만남으로는 세계를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이전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G20의 소집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세계적 불황의 중심에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가 있다. 중국이 상품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다시 빌려주며 거대한 채권 국가가 되고 미국이 상품 수입으로 외화를 지출하면서 거대한 채무 국가가 된 사실은 양국 간의 경제적 균형추가 크게 이동했다는 뜻이다.
미국 경제는 중국이 미국 재무부 채권을 사들이면서 자금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준 덕에 호황을 누렸다. 미국 경제는 지금처럼 허약해진 상태에서, 여선히 수익률과는 상관없이 재무부 발행 채권을 계속 구매하고 잇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는 이보다 개발도상국의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중국도 딜레마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이 미국 재무부 발행 채권 구매를 중단하고 팔기 시작한다면 달러화 가치의 급락으로 이어질 것이며 중국이 보유한 달러화의 자산 가치도 급락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중국과 미국 간 관계의 중심에는 경제적 실익을 위한 파우스트식 거래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국제 질서는 주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쪽으로 설계되어 있다.중국과 더불어 인도 같은 아웃사이더 국가들의 국력이 강해짐에 따라 미국은 이러한 국제 질서와 국제 기구의 역할을 중국과 인도 같은 국가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IMF뿐 아니라 G8에서도 개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8년 말부터는 새로운 브레턴우즈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지든 지금까지 서구 국가들이 누려온 특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된다.

IMF 의결권 지분 : 미국(17.1%), 유럽(32.4%), 중국(3.7%), 인도(1.9%) @2007년
이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새로운 합의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면 서국 국가들은 의결권의 상당수 지분을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에 양보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08년 6월 세계은행은 내부 개혁의 일환으로 그동안 주로 미국인이나 유럽인에게 할당되던 자리인 수석 부총재에 최초로 중국인 린이푸를 발탁했다. 결국 중국은 국제기구 안팎 모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기관의 변화를 도모할 것이다. 동시에 중국은 자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기구의 설립을 추진할 것이다.
이때 새로운 국제기구는 처음에는 기존 국제기구와 공존하다가 서서히 주도권을 빼앗아 갈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많은 혜택을 누리게 해 준 미국 중심의 국제기구가 쇠퇴하지 않도록 격렬히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변화가 있든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초기에는 지역 권역을 중심으로 경쟁 구도가 펼쳐질 것이다. 이때 힘의 균형이 중구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면 세계는 미국 권역과 중국 권역을 중심으로 분열된 가능성이 크다. 이때 동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중국의 권역으로 들어가 위안화 경제권을 이룰 것이며, 유럽과 중동은 여전히 미국의 우산 아래 남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장기적으로 보면 이처럼 단단히 통합된 세계에서 그러한 배치가 그다지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 영어와 중국어의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525쪽~ )
2006년 이후 중국어 열풍은 중국 정부가 세계 각지에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때로는 대학교와 연계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2007년 현재 세계 55개국에 156개에 달하는 공자학원이 있으며 그해 말까지 200개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국 문화원 British Council과 알리앙스 프랑세즈 Alliance francaise, 독일문화원 Goethe Institue을 모델로 설립된) 공자학원은 중국 교육부의 후원을 받아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어 교사를 양성하며 중국 문화를 전파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
세계화 시대에는 미디어도 세계적으로 움직인다. 이때 언어는 소프트파워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영어가 국제 링구아 프랑타로 쓰임으로써 미국은 다양한 혜택을 입었다. 중국어가 앞으로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할 지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영어와 함께 국제 링구아 프랑카로 자리잡을 것이고 어쩌면 영어를 능가할 수도 있다.
...
어떤 언어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언어학의 권위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중세 시대에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가 사멸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이 있었다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 18세기에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미래 상류 사회의 표준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어의 등장은 미국의 세계 지배력과 맞물려 나타난 산물이므로 미국의 쇠퇴는 곧 영어의 입지에 악영향을 미친다. 어떤 언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부상하는 것은 진공 상태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힘에 의해 진행된다.


** 소프트파워로서의 중국 문화 (531쪽~ )
지난 10년 동안 중국 출신 영화배우 궁리와 리롄제, 장쯔이, 홍콩 출신의 청룽이 유명해지면서, 중국 출신 영화감독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대만 출신 영화감독 리안도 함께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는 엄청난 예산(주로 중국, 홍콩, 미국에서 제작비를 지원)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중국 영화들이 중국과 서구 사회에서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로는 <영웅>, <와호장룡>, <연인>, <포비든 킹덤>, <황후와>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중국 영화 산업이 예산이 적게 드는 이전의 실험 영화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블록버스터 중국 영화는 주로 중국 왕조 시대의 찬란한 역사를 소재로 하며, 무술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사극 형태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와 중국 영화는 문화적 특징을 반영하기 때문에 구성이나 접근 방식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 미국관객에게는 영화이 리얼리티가 중요하지만 중국 관객에게는 사회적 리얼리즘이 중요하다. 앞으로 중국의 영화 산업은 할리우드의 세계 헤게모니를 위협할 것이며 중국 영화만의 독자적 가치를 구현할 것이다.
또 소니가 컬럼비아(Columbia Pictures)를 인수하듯이, 조만간 중국기업도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인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수가 할리우드 스타일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중국은 언론 매체부분에서는 아직도 서구에 크게 뒤떨어져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국영 통신사인 신화통신의 규모를 확대하여 세계를 상대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또 중국은 '런민르바오'의 해외판을 만들고 영자 신문 '글로벌 타임즈(Global Times)'를 창간했으며 국영 방송국 CCTV의 해외 송출 프로그램을 더욱 전문화하고 아시아 위성 방송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중국 채널을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
서구 방송사인 CNN과 BBC가 확보하고 있는 해외 시청자 규모에 비하면 중국 방송사들은 아직도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자지라 방송의 성공에서 보듯이, 서구 방송사를 상대로 도전장을 던지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다.
앞으로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해외 시청자 대상 채널 신설, '런민르바오'의 해외판 확대, 새로운 웹사이트 신설 등을 통해 국제 미디어 영역을 확대하려는 중국 정부의 노력이 상당한 결실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CCTV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CCTV은 이미 3000만 명에 달하는 해외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을 중계할 때는 평균 5억 명의 중국인이 CCTV를 시청했으며 시청률이 가장 높을 때는 약 8억 4200만 명이 시청했다.


※ 명랑만화의 완.소.북.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완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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