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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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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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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10:52

대학교 때 공부했던 과목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과목이 있나요?
최근에 나온,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책이 떠오릅니다 - '금방 까먹을 것은 읽지도 말라'(장경철, 비전과리더십) ^^

3학년 때, 교육학과에 열렸던 교양과목 하나를 들었습니다 - '교육의 개념', 저자 직강이었죠.
그 과를 다니던 동아리 선배의 추천을 받아, 필수과목으로 들어야 했던 교육학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배웠습니다.
공대생이었던 저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매주마다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했는데,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었는데,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글쓰기가 많이 늘어습니다.

첫 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칠판에 선생님이 '교육'이라는 단어를 써 놓고, 학생들에게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나온 말들을 '교육'을 중심으로 적고(일종의 마인드맵과 비슷했네요)... 조금 지나자 더이상 쓸 말이 없습니다.
처음 교육학을 배우기에 별로 쓸 말이 없고, 앞으로 여기에 더 채워가야 한다는 얘기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교재로 사용했던 '교육의 개념' 첫부분에 '정의(定義)'의 종류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약정(約定)적 정의'입니다. 이것은 표기를 쉽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약속입니다. 예를 들면, 수, 우, 미, 양, 가와 같이 사용된 단어의 원래 뜻보다는 '요약'과 같이 편리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두번째는 '기술(記述)적 정의'입니다. 사전에 나오는 낱말 풀이와 같이 현재 쓰이고 있는 뜻을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육'을 '가르쳐 기름'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술적 정의의 타당성은 지금까지 사용되는 뜻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냐가 기준이 됩니다. 
마지막은 '강령(綱領)적 정의'입니다. 이 정의는 어떤 말이 지금까지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뜻으로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 상황에서 그 뜻이 얼마나 올바르게 그 문제를 드러내는가가 그 타당성의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이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교육'의 기술적 정의를 묻는다기보다는, 현재 교육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을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특목고나 자사고 등이 늘어갈 때,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교육은 가르쳐 기르는 것'이라 대답하는 것은 일종의 동문서답이 되기 쉽겠죠.
하지만 '다양한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며 부족한 것을 서로 도와주며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주로 성적 줄세우기로 아이들을 뽑고 그 안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핀란드와 같이 일반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 도와가면서 잠재력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 또는 기준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번째 정의 개념은 제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적 정의'는 그냥 현실을 보여주고 거기에 머무르기 쉽지만, '강령적 정의'는 현실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성경을 보았을 때 예수님이 얘기하고자 한 뜻이 좀더 쉽게 와닿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잘 알려진 누가복음 10:25-37입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율법에 대해,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네 이웃은 ~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직접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술적정의'가 되어 '이웃'의 범위가 올바른가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가능성이 커집니다. ^^;
'동네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면,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도요?'
'유대인 모두'라고 하면, '세리와 같은 사람은?'
...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먼저 해줍니다. 앞의 두 사람은 그냥 지나치고, 사마리아인은 도와줍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그리고, 율법학자의 답에 대해,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웃'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나'
결국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이웃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는 이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웃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이웃'이 생긴다는 뜻이 되겠죠.
다행히 율법학자는 '사랑'이 무엇인가는 묻지 않았네요 ^^;
이렇게 해보면, 내가 현재 '이웃'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어,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대학교 동아리에서 후배와 성경공부를 할 때 이것을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 '이웃'에 대해 써 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이 책의 앞부분을 함께 보면서 '정의'에 대해 잠시 얘기를 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웃'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고,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 전체에 대해 얘기합니다.
( 저와 후배의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 )

원래 신약 성경은 그 당시 일반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즉, 누구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겠죠.
그리고, 초대 교회는 그것을 기준으로 행동을 했기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낱말 뜻을 찾는 데서 그쳐서 그냥 '지식'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아 그 뜻을 자기의 이익에 맞게 제한하거나 바꾸는 경우도 있구요.
그래서, 교회는,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곳으로 세상에 비춰지고 있나 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빚진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강령적 정의'를 징검다리로 이용해 보면 어떨까요?

[ㅇBㄷ] '빚진자'의 마음으로...
http://ya-n-ds.tistory.com/807

p.s. 누가복음 10:25~37 조금더 보기...
http://ya-n-ds.tistory.com/858

p.s. 함께 성경공부 했던 후배들이 보고 싶네요. 연락이 끊어진 지 넘 오래되어서 ^^;


※ 명랑만화의 완.소.북.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완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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