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월요일. 셔틀 버스 타러 나가는 대신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준비하는 여유로움, 꿀이 흐르네요~
휴게실에 올라가서 옥상에 나가 봅니다. 어젯밤 비가 내렸는지, 물 고인 곳이 있고, 슬리퍼들이 젖어 있습니다.
어스름이 남아 있고, 갈라진 검은 구름 사이로 푸스름한 여명이 지치기 시작합니다. 날씨가 갤 것 같기도 하네요. 순천역에서 어디론가 떠날 기차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서 후라이를 하고(모양을 동그랗게 해주는 후라이팬, 여러 곳을 다녔지만 게하에서 처음 보네요), 빵을 굽고 잼을 바르고, 커피를 녹인 후 우유를 붓습니다.
아침 뉴스 보면서 냠냠. 곳곳에 있는 인형들이 귀엽네요~
짐 정리해서 7:10 버스 타러 서두릅니다. 7:12 도착, 버스안내표시에 1번 버스가 없습니다.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방금 떠났다고 TT 안내소 시간표를 5분 정도씩 앞당겨 놓을 필요가 있겠네요.
다음 버스 타기까지 근처를 어슬렁거려봅니다. 역을 가로지르는 육교로 올라갑니다. 여수 방향과 구례 방향으로 뻗은 철로 풍경이 구름을 뚫고 밝아오는 아침과 어울려 새롭네요.
덕암 마을, 단독 주택들이 있는 (기차만 다니지 않으면) 조용한 주택가입니다. 출근하고 학교 가기 위해 조금 전에 건너왔던 육교쪽으로 가는 사람 들이 보이네요.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길을 가늠해봅니다. 이번에는 버스 놓치지 않기 위해 5분 전에 도착해야겠죠! 역앞 예쁜 단풍을 배경으로 우주인이 발랄하게 아침 인사하네요 ㅎ
☞ https://www.facebook.com/thames.young/posts/2599351520132594 : '순천역'의 아침
8시 40분 버스 타고 시내를 통과해서 순천을 빠져나갑니다. 철길도 건너고, 고속도로도 지나고. 승주읍 지나 산을 올라갑니다. 저수지도 보이고, '학'자 돌림의 정류소가 이어집니다, '선학', '죽학', '무학'... 승주초등학교 죽학 분교 지나서 선암사주차장에 도착.
파란 하늘이 보이고, 산행하기 좋겠네요. 두 보살님들이 앞서 갑니다. 매표소, 안내 팜플릿이 있는지 물어보니까,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투가 '그런 거 필요하나요?'처럼 들립니다.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일까요? ^^;
가을 잎들로, 위는 색전등처럼 드리우고, 아래는 카페트처럼 덮인 길에 빠져듭니다. 왼쪽 선암사천이 떨어진 잎들과 빚어내는 풍광도 멋지네요. 아직 가을 끝자락이 남아 있어 겨울 색감과 어울려 은은한 빛을 보여주네요 ^^
승탑밭 근처의 고승과 같은 나무들, 이미 '성불'한 느낌입니다. 선암사를 알려주는 두 개의 비가 길 양쪽에 서 있습니다 - '조계산선암사', '선교양종대본산'
조금 더 가니, 세운 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캐릭터 같은 돌 장승이 보입니다 - '호법선신'. 그 뒤로 보이는 해학적인 나무 장승 한 쌍 - '호법선신', '방계정계'(무슨 뜻일까?)
조금씩 구름이 끼기 시작. 아치형 돌다리 2개가 흐린 가을빛과 어울려 보여주는 풍광이 고즈넉합니다. 채도를 조금 낮춰 차분하게 그린 듯한 수채화랄까?
여기저기 길로 물가로 옮겨 다니며, 승선교, 강선루의 가을을 사진에 담아보려는 아저씨의 발걸음이 바쁩니다.
☞ https://www.facebook.com/thames.young/posts/2599359180131828 : 승선교, 강선루
강선루 지나서 가다보니 순암사천을 향해 종종걸음치는 여러 물길들이 보입니다. 삼인당(三印塘) 앞 곧게 높이 솟은 나무 세그루, 장수 같습니다.
저멀리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하마비 지나서 축대로 쌓은 윗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길 옆으로 흘러 내려갑니다. S자로 올라가는길, 걷는 맛이 좋네요 ^^
대나무를 잘라 묶어 길 곁에 만들어 놓은 울타리는 낙엽을 모으고 있네요.
계단 위에 담장과 함께 있는 '조계산선암사' 일주문. 보통은 사찰 건물과 떨어져 있는데, 여기는 일반 건물의 문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계단 옆에 있는 소맷돌, 앙증맞네요.
일주문 뒷쪽 현판에는 전서체로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고 쓰여 있습니다, 조계상이 청량산이었고 선암사가 해천사였던 때가 있었나 봅니다.
여러 단의 공포로 치장한 지붕에 비해서 기둥 높이가 낮아서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데, 기둥 옆의 담이 있어 조금 안정감을 주네요.
안으로 들어가니 다시 계단이 나오고 범종루가 나타납니다. 사천왕문이 없네요. 전설에 의하면 문을 지을 때마다 무너져서, 송광사로 옮겼다고. 루 아랫층에서 기념품이나 공양거리를 파는데 잡화상 같네요 ^^;
루 아래를 지나서 만나는 만세루, 옛스러운 '육조고사' 현판이 '이런 곳이야'라고 말하는 듯. 그런데 단층 건물이라 '루'라고 할 수 없겠네요. 옆으로 돌아 대웅전 마당에 들어섭니다.
단순하지만 마당과 가람 크기에 맞는 탑이 양쪽에 서 있습니다. 가람들이 가을빛이 스러지는 산에 기대어 평화롭습니다.
바랜 단청의 대웅전 처마가 흐린 가을빛과 잘 어울리네요. 스님의 염불, 누군가의 극락왕생을 비는 걸까요?
화재를 대비해서 소화전이 있네요. 선암사에는 예전부터 화재 예방을 위해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 지붕 아래 '해(海)'와 '수(水)'를 새겨 놓은 건물들, 그리고 '해천사(海川寺)'라는 이름.
대웅전 뒤편을 돌아봅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여러 가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습니다.
계단 위 담 사이로 보이는 원통각, 겹으로 된 된 처마가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입니다.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라서 그런지 창살무늬도 화려하네요.
가장 뒷쪽에 있는 산신각, 앞에 있는 응진당 건물에서 지붕 얹은 좁은 길을 내고, 두세 계단 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귀여운 디자인을 한 장인이 궁금해집니다.
진영당 현판, 글자가 사방으로 기운을 뻗어내는 듯한 모습, 색도 금색이네요. 담과 그 아래 화단에는 노란눈이 엷게 내렸습니다.
조금더 위로 올라가자, 곧게 솟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승탑밭이 어울려 있습니다.
정겹게 길을 안내하는 낮은 돌담들, 길을 열어주는 기와 지붕 얹힌 작은 문, 고향 골목길처럼 푸근합니다.
땅을 파고 주위를 돌로 쌓아 만든 못, 마음가는 대로 가지를 뻗은 무심한 나무, 돌 사이를 황토로 마감한 담, 시간이 쌓여있는 문들이 자꾸 마음을 두드리네요.
장경각, 문화재 관리하는 곳에서 조사를 나왔는지 텐트도 있고, 안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구렁이처럼 땅을 기어가다가 고개를 든 모습의 소나무 곁에, 물길과 함께 꾸며놓은 곳, 푸르름이 신비롭게 어려있네요.
일반인의 발걸음을 돌리라는 표지판이 있는 수행 공간, 한 스님이 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공간에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심겨져 있네요 ^^
'무량수각', 대흥사 현판을 본뜬 듯,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고. 하늘은 조금 더 어우둬지고 비가 한두방울씩 떨어집니다.
'뒷간'(ㅅ을 ㄱ과 함께 초성으로 표시했네요), 호처럼 휘어져 가운데가 올라간 입구의 보가 일본식 느낌이 납니다. 기울어진 곳에 지어져, 입구 반대편은 2층 구조처럼 보입니다.
줄맞춰 오가는 스님들이 걸친 빨강색 가사, 눈에 확 띕니다. 잠시 뒤 한 스님이 빨간색 보자기로 싼 것을 어깨 위로 들고 빠르게 걸어갑니다, 뭐지?
☞ https://www.facebook.com/thames.young/posts/2599370033464076 : 선암사
카메라 배터리 표시가 눈금 없이 깜빡입니다. 종무소 문을 두드려 충전 부탁. 잠시 뒤에 오라고 하면서 문을 닫습니다. 신발 벗고 들어가려고 하던 발길이 무안해지네요 ^^;
앉아서 주전부리 먹으며 쉬다가 20분쯤 지나서 배터리를 받아옵니다. 떠나기 아쉬워 한바퀴 더 돌고 다음 여정을 이어갑니다. 비가 심하게 오지는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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