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교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홍대새교회'
☞ http://ya-n-ds.tistory.com/1445 ( 전병욱 목사 & 홍대새교회 )
7월 초, 페북에 김동호 목사님이 전병욱 목사님의 교회 개척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
중간에, 당신은 예정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죄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관점에서는 칼빈주의자라고 언급했습니다. 전병욱 목사님의 죄사함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한다고 읽힙니다.
☞ http://www.facebook.com/#!/dongho222/posts/253041641473454
칼빈의 '예정론'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전병욱 목사님의 성추행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부분만을 떼어내서, 총신대학원 2학년에 재학중인 류재권님이 글을 올렸습니다.
☞ http://www.facebook.com/#!/dongho222/posts/253129684797983 ( 류재권님의 글 전체 읽기... 페북 로그인 필요 )
“6. 그래서 칼빈은 우리를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자입니다. 예정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을 인용하여 앞서의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신학적 신앙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고 그럴 의향도 없습니다(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다만, 6번의 후반부의 “저는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자입니다. 예정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의 부분에 인본주의적 사견/사유가 짙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바른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통한 ‘가르침’을 해주셔야할 ‘목사’님께서 성경에 입각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전목사님의 문제에 초점을 잡으셨어야 했는데 갑자기 그 부분에서 멀어지는 오류를 범하셔서 댓글들을 살펴볼 때 논쟁을 불러일으키시고 말았습니다(목사님의 의도하시지 않으셨더라도 ). 더불어 목사님의 ‘예정’(저는 예정‘론’이란 단어를 혐오합니다.)에 대한 사견을 묻는 무리도 생겼습니다. 같은 신학도로서 속상한 일입니다.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류재권님의 글을 읽으면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고, 그 예정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인간적인 생각'일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칼빈을 신격화하여 예정론을 또 하나의 도그마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
류재권님이 김동호 목사님의 글 안에서 '예정론'을 얘기하려면, 그 '예정론'이 성추행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가지는지를 얘기했어야 올바른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한 페친은 김동호 목사님이 CBS 성서학당에서 얘기한 '예정론 이야기'를 이어놓았습니다.
☞ http://jmstar.tistory.com/65
목사님은 자신이 쓴 논문 이야기를 하면서, '예정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주었습니다.
☞ http://www.facebook.com/#!/dongho222/posts/253728091404809
양희송님의 '돌직구' ?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면 구원을 못받는가?"
☞ http://www.facebook.com/#!/heesong.yang/posts/4342857376042
댓글들을 통해서 논의가 이어지고~ ^^
그리고, 황병구님의 마무리 ?
☞ http://www.facebook.com/#!/hizsound/posts/467737956589021
( '구명정' 비유가 재미 있습니다 ㅎㅎ )
이 '논쟁'이 이슈가 되면서 신문 기사까지..
예정론 반대한 김동호 목사가 이단?
누리꾼들 "예정론은 하나님 말씀"…김 목사 "성경 절대성과 칼빈 신봉 구분하자"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1491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리를 알려주는 글도 있네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리적 구조 일고찰
칼뱅주의 논쟁을 지켜보며(2)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1596
칼뱅주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일고찰
칼뱅주의 논쟁을 지켜보며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1535
윗 글 중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을 비교해 보면 '조삼모사'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대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대가 구원받은 건 확실하지만 그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안심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배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은 칼뱅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 신앙에 긴장을 부여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을 신비로 돌림으로써 택자와 비택자를 100% 확실히 확신할 수 없다며 기독 신자들에게 긴장을 부여했다. 이 긴장이 신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실천을 결과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100%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 구원이 언제 상실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 가야 한다며 긴장을 부여한다. 구원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선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끝까지 마저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은 지금 받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다. 그리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모든 신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를 비롯한 감리교인들이 전통적으로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모범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적 이유다."
어쩌면 제가 고민하던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겠죠. 작년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표현한 'TULIP'에 대해 정리하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붙여놓았는데 생각의 경계가 조금 더 커지네요 ^^
☞ http://ya-n-ds.tistory.com/948
암튼, 전병욱 목사님에 대한 김동호 목사님 글의 일부분에 대해 류재권님이 쓴 글이 이어져 여기까지 온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예정론'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만한 이런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온라인 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 이런 얘기들이 '자유롭게' 나올 수 있다면 한국 교회가 좀더 유연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염~
p.s. "교회 속의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 135쪽,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 'Alan Wolfe,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에서 인용 )
p.s. '예정론', 교회 Q&A의 한켠에 놓아둘 만하네요.
☞ http://ya-n-ds.tistory.com/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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