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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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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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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18:50

'신학의 영토들'(김진혁, 비아) 통해 알게 된 책 중 하나입니다. '조직신학', 왠지 딱딱할 것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부분이죠. 두께가 얇기 때문에 '한번 볼까'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저자는, 유대인은 태어나면서 유대인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하는 차이를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섬기고 예수가 믿었던 하느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 그 체험이 아무리 크고 신비하더라고 빈 껍데기이거나 기만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문제 의식을 가집니다.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알리기 위해 '조직신학'이 필요하며, 이것은 세상이 이해할 만한 언어와 체계로 쓰여져야 한다고 하네요. 

"그리스도교 전통의 자료들에 담긴 진리의 내용은 거듭 새롭게 규정되어야 합니다.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변치 않은 진리를 표현할 때 한때나마 기여하는 언어, 사상의 덧없는 형태들과, 복음의 진리 곧 교회의 교의에 담긴 진리를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특정한 주장이 담긴 전통 속에서 일시적인 언어와 사상의 형태들로부터 진리의 고갱이를 구별해 내는 과제는 계속해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신학이 다시 서술하는 진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사상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모든 위대한 신학 체계와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에서 전한 가르침들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그 진리 자체여야 합니다." (p.14) 

이런 거대하고 담대한 작업에 대한 것을, B6 크기의 110여쪽 지면에 담으려 하다니(짧은 강연 내용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서일까요,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자꾸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되고 ^^; 

( 각 권이 700~1000쪽 정도되는 3권짜리 '조직신학' 책이 따로 있네요 ^^; ) 

근대 이후 교회와 성서의 권위가 절대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기존에 교회에서 사용하던 언어, 사상으로만 신학을 하게 되면, 결국 개인의 체험과 신념의 원리로 대체되는, '주관주의로의 퇴행'(윌리엄 W. 바틀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판넨베르크는, 세상과의 대화를 위해 아래의 세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펼칩니다.  
- '그리스도교 신론', '과학적 우주론 시대의 창조론', '그리스도론의 체계적 구성'

눈에 띈 것은 '창조론'입니다. 
'창조'의 뜻을 먼저 검토합니다. '유한한 존재의 최초 기원'(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피조물의 출현하고 형태를 갖추게 되는 지속적인 과정'(creatio continua)으로 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구별하는 성자 아들의 행위를, 하느님과 구별되는 모든 것의 기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네요. 
또한 창조활동에 관여한 성령의 역할도,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지성화된 '정신'. '영' 등 이라는 개념보다는, 바람, 숨결 등 자연적인(물질적인) 개념, 과학에서 사용하는 '힘의 장'(Field of Force) 같은 개념이 더 가깝다고 합니다. 

판넨베르크는, 세상이 가지는 모든 경험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드러난 진리 요청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교한 학문적 기준을 찾으려고 했고, 사회학자, 물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신학의 '보편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내재적(Immanent)/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론의 관계 설명도 새롭습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이런 내용까지 알려주지 않죠(알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 삼위일체를 이루는 위격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가리키는 표현들('낳다' :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만으로는 위격들의 관계를 충분히 알 수 없음
- 예수가 이 세상에서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고 또한 아버지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이 삼위의 관계를 증언 
- 삼위일체 구성은('내재적'인 태초의 관계), 세상에서 나타나는 삶('경륜적' 구원)으로 드러나고,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 가운데 구성됨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찾으려 하지만, 판넨베르크 자신도, 하느님이 하느님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오직 종말에 이르렀을 때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라고 한 바울로의 바울로의 말처럼, 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한계를 알고, 히브리서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믿음을 가지고 길을 간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이 책으로 머리 속을 한 번 흔들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신학 개념과 섞어 되새김질해 봅니다. '두통'과 '소화불량'이 없기를 ㅋ

 

p.s. '창조론' 꼭지에서 나왔던 이야기 
뉴턴은 기계론적 우주 모형에 반발해서, 세상이 물리적인 힘,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자신의 물리학을 고안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물리적 세계가 더욱 자율적이 되었다네요. 세상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네요.   

 

p.s.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977 : 현대사회에서 조직신학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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