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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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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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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00:01

페북에 아래의 5월 인사말을 남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6월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5월 6일 입하를 지나서일까,
카페 윈도우에 팥빙수 광고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아케이드 천장은 나풀거리던 나비가 파도치는 'Summer Story' 장식으로 바뀌고
교회 가는길 옆 서리풀공원에서 넘어오는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가 마음을 달달하게 해주고
벌들도 그 향기에 들떠 붕붕 ^^"

 

아카시아 꽃잎은 오솔길을 하얗게 물들이며 5월의 추억이 스러져갑니다.
5월, 달력에 빽빽이 들어있는 'OO날' 덕분에 꿈나무교회도 덩달아 바빴네요. 샘들의 수고로 주일마다 아이들의 기쁨이 가득했네요.

 

17일에 있었던 VIP 초청 잔치. 마술쇼로 아이들이 신이 났습니다. 게다가 선물꾸러미까지.
저의 반 아이들은 책 안에서 비둘기가 나오는 것, 신문지로 사다리 만들기, 빈 통에 동전이 떨어지는 마술이 재미있었다고 하네요.

 

'사랑의 확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전도사님. '하나님의 임재'는 참 어려운 물음입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삶 속에서 느끼는 것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또다른 문제겠죠. 욥기, 전도서 등에 이런 고민이 들어가 있지만, 읽는 모든 사람이 답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설교 중에 잠시 나왔지만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박영식, 새물결플러스)는 이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서구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세월호'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를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http://392766.tistory.com/241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828620

 

고통에 대한 '정답'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통받는 자들 옆에 어떻게 있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한 사건'(로마서 5:8)을 이웃에게 전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그 무렵 프란치스코 교종에 대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끌면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다고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할 사람이 평생에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향기'

 

교황 만난 카스트로 “교회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
바티칸에서 첫 접견 뒤 “교황에게 큰 감명 받았다”
교황, 메달 선물하며 “빈곤층 위해 더 노력해달라”
http://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90635.html

 

이런 일의 기본은 (바른) 말과 행동의 일치일 겁니다. 달라이라마나 프란치스코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보수 개신교를 제외하고)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삶을 사는 그들의 진정성에 공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http://ya-n-ds.tistory.com/2192 ( 입몸 하나 )

 

얼마 전에 목사님이 장기려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분의 모습을 인정했기에 길 이름을 그렇게 정하려고 하는 거겠죠.

 

< 장기려로(路) >
http://www.sanjunghyun.or.kr/mboard/mboard.asp?exe=view&csno=&board_id=pastorcolumn&group_name=church&idx_num=25118

 

요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장로님들과는 다릅니다.
http://ya-n-ds.tistory.com/2308 : 교회의 아픔 ( 장로 )

 

차이가 뭘까요. 예수님은 '넓은 길(문)' 대신 '좁은 길(문)'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한국 개신교는 점점 불편함 대신 편리함을 따라갑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이스라엘도 자신들이 풍요해지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를 많이 맺기는 했으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 나라가 번영할수록 석상만 화려해졌다.
변덕이 죽끓듯 하더니, 이제 그 죄를 받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제단을 허시고 석상들을 부수시리라." ( 호세아 10:1 )

 

바빌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외치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린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새롭게 출발한 기독교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국교화 이후 점점 순수성을 잃게 되고 결국 카톨릭의 부패를 경험합니다.
지금의 한국 개신교는 어떨까요? 요즘 읽고 있는 호세아서를 읽으며 비슷한 점을 많이 느낍니다.

 

http://ya-n-ds.tistory.com/2329 ( '이런 사제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
http://ya-n-ds.tistory.com/2334 ( '하나님을 안다고 나에게 외치면서도' )

 

성화 없는(행함이 없는) '이신칭의' 교리에 머무르면서 '바라봄의 법칙'으로 포장된 욕망에 집착하는 대신, 선지서와 복음서의 책망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것은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교역자들은 이에 부응해서 피하는(설교의 '자기 검열' 또는 '수위 조절')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꿈나무교회의 2015년 모토, '예수님 닮은 착한 어린이가 되어요'
산정현교회의 2015년 모토, '더 착한 교회, 더 착한 성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중간중간 쉬운길을 갈 수 있었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말씀을, 하나님과의 기도 자리를 찾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꿈나무교회, 산정현교회는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p.s. 봄에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졌던 '길' 생각입니다.
http://ya-n-ds.tistory.com/2338 ( 길 따라 흐르는 생각 )

 

 

p.s. 교사 회의 때 나왔던 '구원론',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이, 예수를 닮아가게 하는 긴장감을 줍니다.
http://ya-n-ds.tistory.com/3 ( 하나님의 열심 )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 빌립보서 2:10~13 )

 

 

p.s. '고지론'과 '미답지론', 한국 개신교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http://ya-n-ds.tistory.com/2323

 

 

p.s. 얼마 전에 일어났던 어느 목사님의 몰카 사건. 그 사건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는 예장합동의 '이중성'은 민낯을 드러냅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9061 ( 여성 몰카 찍은 사랑의교회 부목사, 교회 '사임' )

 

합동측, 몸통은 빼고 꼬리만 치유
오정현과 전병욱, 그리고 '몰카' 부목사 물타기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979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차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몸통'은 다치지 않고 '깃털'만 뽑히는 경우가 종종 있죠 ^^;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부리는 교수가 '억울하면 교수해~'라고 했다는 전설처럼, 부교역자들도 억울하면 회사 CEO와 같은 '큰 목사'가 되는 방법밖에 없을까요?

 

개신교의 담임목사 제도를 보면, 교역자들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역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 등이 한국에 와서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

 

< 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 설문결과와 자료집을 공유합니다 >
http://cemk.org/2008/bbs/board.php?bo_table=2007_notice&wr_id=3039

 

 

p.s. '영상 녹화 설교', 사람의 욕심이 아닐까요? 예배, '영화'가 아닌 '연극'처럼 '지금, 여기'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 다른 'Dear샘s'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Dear샘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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