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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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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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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16:09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로 이어지는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서서히 데워지는 그릇 속의 개구리처럼 무감각해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심리학'이 가장 앞에 온 이유가 있겠죠. '사람'이 우선 순위가 되는 심리학 - 사람 내면의 '상처'에 관심을 갖습니다. '상처'는 '죄'의 개념을 희석시킵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개념을 갖게 하고, 자연스럽게 '치료'를 통한 '자존감', '자신감'의 회복이 목표로. 하나님은 이를 위한 '의사', 성경은 '치료약' 정도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교회는 인간의 마음에 맞춰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복음'이 상품이 되어 포장도 예쁘게, 마음의 부담감도 느끼지 않도록...

김정운님은 미국식 경영학은, 입력에 대한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815 ( 미국은 광대한 심리편집실 )

이러한 경영학이 미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다시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 기독교로 들어오게 됩니다.
경영학은 기본적으로 숫자로 나타나는 '성장'이 가치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경영학을 받아들인 교회는 자연스럽게 등록 교인의 숫자를 교회 성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소비자'와 '상품'을 연결하는 '마케팅' 기법들이 필요해지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마케팅 도구는 '잘되는 나'와 같은 '성공 신학'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이 부흥회의 한 켠을 차지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얻은 지위나 명예에는 주목하지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 자체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문대성님의 이야기는 '스타 마케팅'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37555 ( 문대성 당선자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타락 )

그리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에 대해 뉘우치지 않은 목회자와, 그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의 '욕망'과 그에 맞는 설교가 어떤 시너지를 일으키는 지를 알려줍니다.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1706 ( 그들은 왜 전병욱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가? )
http://ya-n-ds.tistory.com/1445 ( 홍대새교회 )

현대 사회에서 성공의 잣대가 돈이기에, 결국 '은혜'는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공식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북오션), 이런 '은혜'의 개념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록펠러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예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http://blog.naver.com/cuddington/140117602206 (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 )

옥성호님은 교회에 경영학이 들어오게 된 역사적 과정과 그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로서, 모델이었거나, 모델이 되고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빌 하이벨스), 새들백 교회(릭 워렌), 레이크우드 교회(조엘 오스틴)에서 선포되는 내용을 들여다 봅니다.

책에서도 지적하지만, 성경의 진리나 바른 복음에 대한 얘기보다는, 그냥 서로 부담없는 '은혜'로운 이야기 속에서 자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 교회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교회 속의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 135쪽, 'Alan Wolfe,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에서 인용 )

읽으면서 나름 가지고 있던 '기준'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들이었네요.,
올해 만났던 다른 두 책과 함께.
http://ya-n-ds.tistory.com/1360 ( 팀 켈러,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 두란노 )
http://www.christiantoday.co.kr/books/view.htm?id=53682 ( 박일배, 너무도 성경적인 십일조 이야기, 리북 )
( 블로그 :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cuddington&from=postList&categoryNo=52 )



※ 명랑만화의 완.소.북.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완소북


--- '마.부.기.'에서 -------------

"...
월간잡지 '목회와 신학' 2007년 4월호 광고 ;
'제1회 대한민국 신학대학원생 설교대회 본선'

두란노 서원과 한국 설교학회가 대한민국 차세대 설교사역자들의 설교 작성과 전달의 발전을 돕고자 아래와 같이 설교대회를 개최합니다.

...

오늘날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찬양경연대회도 우리가 조금만 눈을 뜨고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대회도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찬양과 설교를 가지고 어떻게 대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복음이 사람을 위한 상품이 되고 교회가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하늘로 향하고 박수를 친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품으로 전락한 설교 속에 사는 교인은 글을 모르는 문맹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문맹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 189쪽~190쪽 )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하나님을 의지해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시장을 통해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돌고 배웠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우리 교회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꾼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의 실재를 우롱하고 자신의 모험과 경력을 선전하는데 그분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하나님이 잠자코 계시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몰두라는 '철창'에 하나님을 가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화한 은혜의 햇빛이 우리의 예상만큼 우리를 따뜻하게 하지 못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번영과 성공을 쏟아붇지 못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 198쪽~199쪽 )
( '거룩하신 하나님'(데이비드 웰스, 부흥과개혁사) 169~170쪽에서 인용 )

http://www.sanletter.net/letter/lastview.asp?mailbox_idx=3779 ( [산마루서신] 성전의 회복 )


"...너무 자주 우리는 이 내용없는 희열을 '은혜'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을 봅니다. 일어서서 노래는 한 시간이라도 부르는 사람들이 성경만 펴면 졸거나 도대체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이 없어도 멜로디만 아름다우면 노래는 한 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지만, 내용이 있는 성경 말씀은 보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204쪽 )


'사학자 데이비드 포터는 광고에 대한 예리한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일단 마케팅이 지배하게 되면, 관심은 "그들의 메시지를 들을 청중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청중이 들어줄 메시지를 찾는 데" 있다.
결국 메시지가 아닌 아닌 청중이 주도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교회 목사들이 그들의 사역 대상자들의 필요라는 "시장'에 메시지를 맞추게 되면, 그들의 설교는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려운 것은 빼놓게 되는 것이다. 죄와 자기부인, 희생, 고난, 심판, 지옥 등에 관한 가르침은 사라지게 된다.
온통 필요충족만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성장운동에는 세상과 맞부딪치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
메시아 마케팅은 위험스럽게도 현대의 복음주의를, 일찌기 리처드 니버가 "진노없는 하나님이 죄없는 인간들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심판없는 왕국으로 데리고 간다"라고 비판한 자유주의에 더 가까워지게 하고 있다.'
( 262쪽 )
( '교회성장 운동의 새로운 기초'(오스 기네스, 생명의말씀사) 107쪽에서 인용 )


'서구 교회 성장의 성공은 주로, 회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이동에 의한 성장이다 (어떤 사람은 미국의 경우 80% 정도까지 된다고 말한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짐 피터슨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류의증가는 전혀 교회 성장이 아니다. 그것은 52장의 카드패를 다시 친 것에 불과하다.'
( 270쪽 )
( '교회성장 운동의 새로운 기초'(오스 기네스, 생명의말씀사) 112~113쪽에서 인용 )


"나는 빌 하이벨스 목사가 세상의 각종 문화적 도구들을 교회 속에 도입해서 사용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복음을 희석시킬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교회 속에 도입하는 문화 그 자체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데이비스 웰스 )
( 274쪽 )
( http://www.ctlibrary.com/14376 에서 인용 )

"문제의 핵심은 명료합니다. 마케팅 전략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에 충실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 존 맥아더 )
( 274쪽 )
( http://www.ctlibrary.com/14376 에서 인용 )


< 308쪽 >
복음이 희석되는 만큼 복음은, 죄에 빠지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해 덜 위협적이 된다.
복음이 원래의 그 능력을 유지하는 만큼, 회개하지 않는 이 세상과 자손심에 찬 인간은 그 복음에서 도망치려 한다. 당연한 결과다.
이점이 바로 구도자의 필요에 민감한 교회들이 가진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다.

나는 얼마전 구도자 중심의 교회를 이끄는 한 목사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교회에서 결코 '위협'이나 '정죄하는 말들'이 아니라 '편안함'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느껴하 하는가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약 누구나 다 아는 죄를 짓고 사는 어떤 사람이 당신 교회에 오는 경우, 당신은 그가 짓고 있는 죄 문제를 바로 다루겠습니까?"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린 후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는 무엇보다 그 사람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그럼 얼마나 더 있다가 그가 짓고 있는 죄를 거론할 생각인가요?"
"글쎄요,한 1년 반 또는 2년 정도 후에나요. 왜냐하면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도 이제 교회에서 아주 익숙해질 테니까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내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죄속에 빠진 사람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를 죄 속에 계속 방치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게 당신 교회와 우리 교회의 차이입니다." 나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다 아는 죄를 공개적으로 짓고 있는 사람들이 마약 우리 교회에 온다면 그들은 구원 받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은 다시는 우리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복음을 외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에 잘못된 이유들 때문에 복음에 이끌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John F. MacArthur, Hard to believe, Nelson, 2003, p.162 )


< 311쪽 > 오스 기네스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항상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종종 필요 이상으로 충족시킨 나머지 결국 환멸감을 느끼게 한다.
이마누엘 칸트가 러시아 역사가 카람진에게 말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어 보라. 그러면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 354쪽 >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막연해보이고 어려워보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인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천 년에 걸친 교회 역사와 그 기간 중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외에 정말로 누군가를 꼭 만나서 배우고 싶다면 그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백금산 목사가 쓴 '큰 이물 독서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 읽기를 통해 큰 인물에게 왜 배워야 하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
우리 신앙의 스승들은 효율적 관리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무엇이고 크리스천이 무엇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더불어 진짜 만나야 할 컨설턴트들은 바로 교회사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입니다."

< 369쪽 >
... 교회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것은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으면 옳고 좋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름없는 목사가, 각종 비리로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를 비판한다고 할 때, 그 비판하는 목사를 대하는 주변의 반응을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비판적이냐?'(우리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말을 하는 사람 역시 '비판적이다. 자기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는 '말은 그만하고 기도하라'(이 사람 역시 자신은 기도하지 않고 말을 먼저하고 있는 자기 오류에 빠져 있다)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 중에서, 만약 누군가가 '너는 교인이 천 명은 되냐? 그런 비판하고 싶으면 최소한 교인을 천 명 이상은 만들어 놓고 해라. 백 명도 안되는 교회를 운영하는 주제에 어디 감히 몇만 명 아니 몇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끄는 하나님의 종을 비판하고 그래?'라고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중심에 두고 있는 가치관, 판단기준은 무엇입니다? 바로 '큰 것은 반드시 옳다'라는 절대적인 전제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큰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니 큰 교회의 목사는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부흥'을 이룬 '하나님의 종'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겠지요. 따라서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하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부흥에서 제외된 작은 교회 목사가 감히 '하나님의 종'을 비판하는 것은 참기 어려울 지 모릅니다.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 느끼겠지요.

 
< 370쪽 >
"하지만 한국교회는 알게모르게 이 숫자와 관련하여 세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난 2006년 한해 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교회의 많은 목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아마도 갤럽 조사 결과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통계청의 발표였던것 같습니다.
이 발표와 관련해서 각성과 괴로움을 토로하는 여러 편의 설교와 글을 그후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낯을 들고 설 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질적인 면에서 교회가 뒷걸을치고 세상의 조롱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면서도 양적인 면에서 조금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목사의 의식 속에 '양은 질을 반영한다'라는 깊은 인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4000만이 다 교회를 다니게 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달라질 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1000만 명이 하지 못하는 것을 4000만은 할 수 있을까요?"
 

< 371쪽 >
"양적 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리가 자초한 후유증 가운데는 '삼허 현상'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지 않나 생각된다. 무엇이 삼허현상인가? 허수, 허세, 허상이다.
허수는 한국교회가 그 동안 통계에 통탄할 정도로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얼마나 이 문제가 심각할 지는 한국 교회의 통계를 가장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교회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인수 등 중요한 통계치는 두 배, 세 배로 과장해서 말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수치라고 변명하는 것을 본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정직성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량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불신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우리가 교회의 크기만을 앞세우는 눈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목회를 '성공'이라고 하는 좁은 렌즈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 '다시쓰는 평신도를 깨운다'(옥한흠, 2006) pp.25~26 )
 

< 385쪽 >
다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끼리 만났을 때 "너희 교회는 몇 명 나오니?"라는 질문은 너무 당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교인이 많을 경우 은근히 마음 속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요.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다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가장 큰 회사인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삼성맨'이라고 부르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규모에 대해 사회가 주는 가치관을 교회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386~387쪽 >
"불행하게도 피니가 그의 설교를 통해 누린 초기의 성공은 그의 신학 속에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했다. 피니는 자신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기 전 자신을 인터뷰하는 장로들이 "자신들이 가진 신학과 충돌할 위험이 잇는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에게 질문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더라"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그 장로들은 분명 피니가 누리고 있는 부흥사로서의 엄청난 인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John MacArthur, Ashamed of the Gospel, Crossway, 1993, p.230 )
...
이미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큰 교회의 목사님들에게는 '당신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곳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께 '네가 틀렸다'라는 저주를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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