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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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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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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16:09

## Bloger's Browsing
http://blog.naver.com/ahddnwhtpqzl/120124613999
http://blog.naver.com/midasbooks/30102355390

2010년 한국사회의 화두 중에 하나가 '정의'였습니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불을 붙인 것 같기도 하네요.
실용서나 소설이 아님에도 베스트셀러 1위가 되는 것도 이례적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정의'라는 주제가 이렇게 퍼진 것은, 어쩌면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정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위치에 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이명박님도 광복절에 '공정사회'를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정책을 보면, '공정'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와 가까운 의미인지는 자꾸 헷갈립니다 ^^;

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정의'에 편승한 책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 쪽 읽은 후 '!!' 25살에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더 놀라게 하네요. 하지만 글은 쉽게 읽힙니다. 날렵한 물수제비가 강물을 튀기듯이 ^^
부제가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사회의 위선을 10개의 인문학 프레임으로 '찢어발기는' 책입니다. 프로로그는 좀더 자세히 알려줍니다.
"21세를 맞이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의 한국 사회를 읽기 위해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인문학적 감수성이었다.
18만 명이 가수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타진요의 정의'를 읽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프랑스 혁명과 마리앙투아네트였고,'슈퍼승자독식사회'를 읽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개그맨 김병만이었다.
'슈퍼스타 K2' 이후 '공정사회'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우승자 허각을 읽기 위해서 나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불러들였으며, '자연산 예찬론자' 안상수를 읽는 데는 프로이트 이론의 힘을 빌렸다."
 
이택광님의 '무례한 복음'(난장)도, 문화적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비슷한 책입니다.
http://nilnilist.tistory.com/88
http://blog.naver.com/caujun/60088550178

이 책은 그것보다는, 배경이 되는 이론의 설명이 많습니다.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더 읽어볼 책들을 설명해 준 부분도 이 책의 미덕이 안닐까 싶네요. 이 책 하나면, 1년 정도는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간중간에 필요한 설명도 책의 맨 뒤쪽에 놓는 대신 그 장에서 아래에 놓아 편리하네요.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라고 고백합니다. 인문학을 하는 이유가 단지 세상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동시에 그곳에서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떳떳하다는 의미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용기있게 내보일 수 있는 삶'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될 때, (우리를 점점 순응하게끔 만드는) '세상'에 용기를 가지고 대할 수 있게 되겠지요.
"세상에 속수무책으로 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적나라함과 위선, 그리고 그 모습을 즐거워하며 쳐다보는 '빅 브라더'들을 극복하는 데 내 용기가 쓰일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있겠는가."


한 점 맛보세요.

< 광장을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하다 - 대의민주제와 직접민주제의 관계에 관한 편파적 시각 >
* 용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 p.126~ )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어찌되었건 고통받는 자들 혹은 약자들의 권리가 그들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에 의해 대변된다. 그래서 새우는 고래 싸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나타내고 어느 한쪽 고래 편을 들어줘야만 한다.
설사 등이 터지더라도 새우는 거기서 발을 빼면 안된다. 발을 빼는 순간, 등만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이 성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최선이 아닌 차선이라도, 최악을 피해 차악이라도, 강한 사람들 중 어느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줘야만 한다.
이를 두고 대의민주제가 마주한 존재적 모순이라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부작용의 가능성은 상시적이다. 예컨데 선거철만 되면 국민주권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현실을 보라! 이런 이유로 대의민주제에 관한 비판은 '국민주권은 완전 구라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 나는 지금의 이 체제, 즉 대의민주제에 관해 좀더 너그럽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예컨데 지난 2009년 새해 벽두를 충격 속에 몰아 놓은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자. 엄밀히 말해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스스로 망루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절박해지는 삶의 투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대변해 주지 않은 정치적 현실이었다.
전국철거민연합과 단단한 연대를 과시하는 민주노동당이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5명의 국회의원이라는 그들의 현실은 정치에서 누군가를 힘 있게 대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아무리 민주노동당이 철거민연합의 투쟁에 힘을 보태려고 해도,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망루에 오르거나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활용해 온 몸으로 막는 것뿐이다.
... 결국 망루에 올라가지 않고 투표나 지지활동, 더 적극적으로는 정당활동으로 스스로의 권리를 찾는 길을 지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리하자면 보다 좋은 대변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고통의 악질적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장 '덜 아픈'방법이란 말이 된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대변자가 있을 때는 설사 망루에 오른다 하더라도 무지막지한 탄압에는 시달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서구에서는 강력한 노동자 정당을 뒤에 둔 노동조합을 그 누구도 만만히 보지 못한다.
...
대의민주주의를 두고 인류가 발견한 최선책이라 이르는 것은 그것이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어서가 아니라 느리고 소모적이지만 보다 인간적인 길인 까닭이다. 

* 누구에게나 욕망할 권리는 있다 ( p.129~ )
세속사회를 지지하는 나의 관점에서, 각자 혹은 각 계급 및 계층에게 정치적 대변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각각의 욕구 혹은 욕망이 다종다양하기 때문이다. 철거민의 투쟁을 욕망의 눈으로 읽는 관점이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욕망이야말로 근대인들이 향유할 당당한 권리라 본다.
전근대 시기는 욕망이 있어도 그것을 표현할 권리는 지배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이 아니었던가? 조선시대의 노비는 자기가 살고 싶은 주거지조차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
그런 점에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철거민의 투쟁은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욕망을 추구할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당장 의식주을 해결할 여력도 안 되는 철거민들을 욕망을 추구할 권리마저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근대 사회에 강제로 납치된 전근대인들이 되어 버린다. 주거지조차 선택할 수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보면 전근대의 피지배계급과 현대의 철거민들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운가.
이런 맥락에서 철거민들은 애초부터 법치주의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잇는 대상이 아니다. 근대국가의 상징인 법치주의는 근대국가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라야 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이다.


## 박근혜 현상 보기
< 안상수가 알려준 박근혜의 약점 - '룸'과 함께 하는 정치에서 아버지의 힘으로 살아남기
* 박근혜를 지켜주는 강한 남자 ( p.139~ )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전 대표 역시 한국 정치의 '남성성'을 누구보다 크게 수혈 받고 있다. 만일 박근혜 전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아마 박 전대표가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정치적 잠재력을 가졌더라도 아버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국회의원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제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현대사에서 아버지상을 대표한다. 마치 프랑스 혁명기 당시 대중들에게 루이 16세는 한편에서는 극복해야 할, 한편에서느 지켜야 할 똑같은 아버지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박정희는 정치적 아버지에 해당한다.
진보나 개혁 세력의 입장에서도 산업화를 상징하는 박정희는 극복해야 하는 아버지로 상징화된다. 이같은 박정희의 강고한 아버지 의식이야말로 박근혜 전 대표의 가장 든든한 방어막이다. 박정희의 최후 역시 안상수의 '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청와대 '안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자연산'인지는 모르겠으나 20대의 젊고 아리따운 여성 둘을 끼고.

여기서 나는 또 한편으로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문화적 측면을 본다. 정치를 바라보기 위해 프로이트의 관점을 빌린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에 의하면, 보수정치는 강한 아버지를 상징하고 진보정치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상징한다. 예컨데 보수정치의 강한 아버지는 강한 자식을 키워내는 데 주력하지만, 진보정치의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이 도전할 만한 기회와 상황부터 온전히 만들어 주는 일에 주력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 정치의 본류는 여성에게 배타적이다.

하지만 여성 박근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수혈 속에서 보수정당의 여성 정치인으로 살아남는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강한 남성의 수사(레토릭)로 보수 정당의 여성 정치인으로 살아남았다면, 박근혜는 철저하게 아버지를 향한 대중의 의식을 환기시켜가며 살아남았다. 2012년 대선을 향해 '복지국가'라는 포석을 내세우면서, "아버지의 최종 목표는 복지국가"였다고 굳이 말하는 것을 보라.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한 아버지를 상징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야말로 '룸'에 가지 않는 박근혜 전 대표의 '여성성'을 가장 크게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 '철인(哲人)' 박근혜 >
* 박근혜의 문화 코드 ( p.256~ )
박근혜가 세속의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이미지를 처음으로 내보이는 계기는 당연하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다른 대통령의 자녀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가 있다. 바로 애틋함이다. 1980년대 이후 출생인 우리 세대가 박근혜에게 애틋함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희박하겠으나,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기성세대들에게 박근혜는 애틋함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부노가 모두 총탄에 의해 사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이후 그녀가 장녀로서 동생들을 이끌고 '인고'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기간 동안 박근혜는 자신의 막내 동생 박지만이 마약 복용으로 수차례 구속되는 데 비해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으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나간다. 이런 인생의 서사들은 대중들에게 박근혜란 인물을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결정적으로 박근혜를 세속의 일반인 혹은 정치인들과 구별시킨 것은 박근혜의 언어들이다. 아버지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박근혜가 가장 먼저 했다는 말은 "전방은요?"라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지방선거 유세 현장에서 면도칼 테러를 당할 때도 박근혜는 당시 열세를 보이던 대전 시장 선거를 이야기하며 "대전은요?"라는 말을 했단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런 일화들은 박근혜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세속의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절제'와 '믿을 수 없는 책임김'을 보여줬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심어줬다.

한국사회에서는 역설이겠으나, 이런 이미지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박근혜의 '미혼'이다.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박근혜는 장녀로서 동생들을 결혼시키면서도 본인은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또 다시 '헌신'과 '절제'의 이미지를 상징화한다. '미혼'은 그녀의 강고한 '국가관'과 연계됨으로써 마치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인물이라는 문화적 상징까지 창출해낸다.
이렇게 박근혜라는 기호는 '희생', '헌신', '절제', '믿을 수 없는 책임감' 등의 기의로 해석되면서 하나의 '철인적 인간'의 전형으로 대중들에게 이미지화된다.

이 문화적 상징은 지난 6~7년의 유력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훨씬 더 강화되어 왔다. 열린우리당 집권 시절, 천막당사 신화라는 이름으로 총선 완패를 막아낸 박근혜는 그 이후 벌어진 모든 재보궐 선거에서 '불패' 행진을 거듭함으로써 그 신화적 특별함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
사실 역경을 이겨낸 인생이라는 '자장' 안에서 노무현과 이명박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코리안 드림'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문화적 코드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과 박근혜가 다르 이유는 특유의 성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침묵의 정치'와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인해 세속의 인간과는 다른 곳에 사는 철인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역경을 이겨낸 '세속인'이라면, 박근혜는 역경을 이겨내면서 '철인'이 됐다고 상징화된다.
노무현과 이명박의 상징화된 코드가 세속인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배짱'과 '도전'이라면, 박근혜의 코드는 '철인'의 코드처럼 느껴지는 '절제'와 '헌신'이다.


## 달인
< 해태 타이거즈를 추억함 - 한시대를 풍미하던 거인들의 이야기 >
* 타이거즈의 몰락 ( p.148~ )
아이러니하게도 타이거즈가 서서히 몰락을 시작한 시기는 DJ 집권기였다. 국가부도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은 DJ는 IMF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강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었고, 타이거즈의 모기업 해태는 야구단을 시장에 내놓기에 이른다.
...
기아로 불리게 된 타이거즈는 리그에서 가장 비싼 신인을 데려오는 팀이 됐다. 신인 한기주에게 10억, 또 다른 신인 김진우에게 7억의 계약금을 주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타이거즈의 유니폼은 여전히 붉은색이었지만, 거기에 스며들어 있던 코리안드림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맨제스터의 노동자들이 만든 팀이자 노동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000년대 이후 미국의 부호 글레이져 가문에 매각되면서 스포츠 상업주의의 상징이 됐듯, 타이거즈는 더이상 호남 '서얼'의 팀이 아닌 다른 팀과 똑같은 프로팀으로서의 기아가 됐다.

자본의 뒷받침이 없으면 스포츠 경기에서도 승리할 수 없는 시대에 타이거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야구팀 뉴욕 양키스를 닮아간다. 노동자 문화에서 성장한 잉글랜드 축구가 프리미어리그로 재편된 이후 전 세계 자본들의 홍보 수단이 된 것처럼, 타이거즈는 기아 아니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이미지 홍보수단이 됐다.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 축구 팬들이 잉글랜드 첼시의 유니폼에 아로새겨진 삼성의 로고를 자랑스러워하는 이 시대적 영토에서는 기아마저 없다면 타이거즈라는 이름조차 살아남기 힘들다. 지금은 스포츠 경기를 두고 지상파 계열 스포츠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유사 도박판을 벌이는 스포츠 자본주의의 시대가 아닌가.


< 개그맨 김병만 - 승자독식도 못하는 어느 작은 거인 이야기 >
* 성장을 기다려주지 않는 사회 ( p.153 )
설사 공개 코미디라는 장르에 애정을 갖지 않았더라고 장기적 관점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성에 조금이나마 감수성이 있는 방송국 간부라면 도리어 스타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것을 장점으로 활용하도록 돌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시청율 공포증(더 정확히는 광고 공포증)에 감염된 대다수 방송국 간부들은 스타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인기 요인을 찾아보라고 끝없이 채찍질해댄다. 작은 거인 여러 명이 만들어내는 합작 생산품이 아니라, 큰 거인 한명이 만들어내는 단독 생산품이 최고라는 시대의 트렌드는, 작은 선수들이 작은 거인으로 커나가는 것조차 기다려주지 않는다.
...

익명성 따위는 없는 오프라인 세상은, 그래서 여전히 20여 년 전 이건희가 내뱉었던,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유명한 말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희의 말과 달리 한 명의 천재는 10만 명을 먹여살리지 않으면서 돈만 독식한다. 스타 선수에게 후보 선수의 10배가 넘는 연봉을 지급하는 프로 스포츠 사장이 그러하고, 스타 시스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방송 시장이 그러하다. 그야말로 로버트 프랭크의 말처럼 '승자독식사회'다.

* 모두가 '달인'이 되어야 하는 되어야 하는 시대 ( p.153~ )
... 그런데 사실 김병만이 꼭 허풍쟁이로 나오는 건 아니다. 잘 떠올려보라. '달인'에서 김병만은 어느 정도까지는 손쉽게 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람들은 자꾸 그 이상, 그리고 그 이상을 요구한다. 결국 김병만은 궁극에 가서는 실패하고, 허풍쟁이로 낙인찍혀 무대 뒤로 황급히 사라진다.
달인의 서사는 그래서 공감을 준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거뜬히 하지만 가장 어려운 건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그래서 노동자들의 기계적 삶을 '달인'으로 치환시키는 '생활의 달인'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일 게다.
요컨데, 이 새대는 기계적으로 매일같이 일해서 '달인'이 되어야 하는 시대다. 그걸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으로 상찬하는 시대다. 포스트모던 시대라서 그런지 포드 공정 시대를 상징하는 기계화된 노동자들이 마치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하듯이 '달인' 노동자가 되어야 비로소 '노동자답다'고 인정받는 시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지 따위엔 관심이 없고, 단지 '달인이냐' '달인이 아니냐'만 따져댄다
...
이런 시대에 어느 정도껏 하는 사람(절대 게으름이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조금 허풍 떠는 '달인'은 설사 자기 허풍만큼 해내지 못했더라도 50% 정도는 해냈는데, 그 50%의 성과마저 무시되고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 승자독식도 아무나 '달인'이나 하는 게 아니다 ( p.155~ )
...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생활의 달인' 출연자들을 생각해 보라.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로 보이는 이들이 아무리 기계화된 공정에서 빛을 발휘한들 그들에게 과연 승자독식의 기회가 주어지기나 한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사장들은 그 뛰어난 '공정' 실력을 칭찬하면서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것조차 고민하고 있을 게다. 그리고나서 불현듯 생각날 때 대중은 그들에게 '대단하다'라거나 '존경스럽다'의 말 따위로 갈음해버린다. 마치 평소에도 그들에게 큰 관심을 보여 왔던 것처럼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은 것도 여기서 연유할 것이다. 애초부터 돈에 연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돈이 전혀 모이지 않는 삶 때문에 초연해진 이들에게 그 '순수성'에 존경을 보낸다는 말 따위만 던진다.



< 낙오자 김길태 - 사회적 배제자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
* 왜 13살 초등학생도 낙오자가 되는가 ( p.164~ )
한국의 사회적 배제는 패자부활전이 존재하지 않는 '각개약진 공화국'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낙오자의 절망에서 비롯한다.
...
그러나 학벌사회가 점차 움직일 수없는 하나의 구조가 되면서부터는, 누구나 잔혹했다고 회고할 만한 입시전쟁이 시작된다. 이에 따라 이미 청소년기부터 사회에 분노하는 13~14살의 어린 낙오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높은 대학 진학률이 학교의 실적을 은유하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학교들은 성적 좋은 소수의 학생만 집중적으로 키우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대학도 안가고 공부도 안 할 사람은 차라리 공부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얘기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
교사에게 철저하게 잊혀버린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어떤 길을 택할까? 아마도 어린 시절에 겪은 사회적 배제의 이데올로기는 이를 경험한 이의 향후 인생에 두 개의 극단적인 길을 제공할 것이다.
하나는 분도의 배출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회적 배제 이데올로기를 완전 체화하면서, 자신을 철저한 기성 사회 규범의 추종자로 만드는 것이다. 분노의 배출은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배제 이데올로기의 완전체화는 자신이 서민층이면서도 같은 서민층을 혐오하고 성공한 엘리트들을 준거집단으로 삼는 반계층적 인간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가장 착취당하면서도 가장 기득권 옹호적인 생각들을 펼치는 경우는 바로 이런 공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회의 다양한 병폐들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하는 사회적 착시효과의 난무다.


p.s. 고재석님 블로그입니다.
http://blog.naver.com/wakefly17


※ 명랑만화의 완.소.북.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완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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