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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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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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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16:09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인문, 사회과학으로 점점 넓혀나갑니다. 아마 우리 사회가 점점 복잡해져서 기존의 '계몽주의적' 관점으로만은 설명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는 기술,과학을 바탕으로 경제적 상황만을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시중에는 '콘서트'를 돌림자로 사용한 여러 책들이 나왔습니다. 사회 현상을 풀어나가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EBS에서 기획한 '지식프라임'(밀리언하우스)과 같이 방송에서 시청자의 평가가 좋았던 교양프로그램의 에피소드를 모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런 것도 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이책 역시 비슷합니다.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 교양강좌 '아름다운 공동체를 향한 사회적 상상력과 교양'에서 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 교수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바라본 이 세상을 그려 나갑니다.
머릿글에 이런 말이 있네요.
"무엇보다 이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구체적인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한 '성찰의 힘'이다. 냉철한 이론가 뜨거운 열정이 공존한다. 어저면 이 책에 그려진 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의식은 깨어나리라고 생각된다."

강의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사이사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메워졌으면 좋겠네요 ^^


## 2강 : 역설의 한국 현대사, 그 인식과 계승 (정용욱)
* 현재를 알아야 과거가 보인다 (34~35쪽)
매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 현대사를 신청한 동기를 물으면 99%의 학생들이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고, 현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사를 수강한다"는 대답을 왼다...
그러나 과연 과거를 알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인식의 순서로 보면 그 역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학 개론 첫머리에서 접하게 되는 E.H.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유명한 정의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경구에서 되새길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역사란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된 과거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현실이 과거에 발생한 사건의 명칭조차 바꾼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칭 변화도 마찬가지다. 발생 당시 그 사건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북괴 5열의 선동에 의한 폭동', '소요' 등으로 불렸고, 국내 신문들은 앵무새처럼 전두환 일당의 발표를 되뇌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폭동과 소요로 부르는 사람은 신군부 핵심 세력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 가운데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폭동과 소요을 민주화운동으로 바꾼 것은 역사가들의 붓이 아니라 1980년대에 국민적 지지 속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이었따.
...
과거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의 다른 한 축인 '현재'에 대한 이해가 급선무다...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의 본질, 또는 본질에 대한 이해는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집회가 왜 몇 백 회씩 아무런 성과없이 지속되고 있는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주장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일본 당국과 한국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지, 일본 극우 세력의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대한 입장과 그것에 대한 역사 편찬 태도는 어떤 것인지 살펴 봄으로써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 사료는 참말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한다 (39~40쪽)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 (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5.12.27 )

이 기사는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연말에 남한 사회를 반탁,반소운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 '역사적' 기사다. 이것은 연합국의 2차 대전 전후 처리 회담인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의 전후 처리 방침을 보도한 기사다.
두 신문은 이 기사를 워싱턴발 외신으로 위장하였으나 이 기사의 취재원 워싱턴발 외신이 아니고, 당시 태평양 지역에 주둔해 있던 미 육군을 위해 도쿄에서 발간하던 <태평양성조-Pacific Stars and Stripes> 1945년 12얼 27일자 기사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옮긴 것이다.
... 더구나 이 기사를 발신한 통신사에서도 이 기사를 발견할 수 없고, 다른 어떤 외신도 이 기사를 다루지 않았으며, <태평양성조>와 국내의 두 신문만 이 기사를 보도했다면 누군가 도쿄와 서울에서 이 기사를  이들 신문사에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고, 경정서 내용 가운데 앞뒤 맥락을 빠뜨린 채 신탁통치만을 강조한 이른바 왜곡 보도였다. 삼상회의 진행과정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고, 즉시 독립을 주장한 것은 소련이었다.
결정서는 미.소 양군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가 한국인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협의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와 협의하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규정하였으며, 그러한 내용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절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이 기사는 의도적 오보였고, 사실은 여론 조작을 위한 왜곡 보도였지만, 왜곡의 주체와 과정, 그 동기를 보여주는 확정적인 증거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보도는 1945년 말~1946년 초 국내에서 반탁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으며, 국내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반민족 대 미족'에서 '좌우대립'의 구도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해방 직후 <동아일보> 지방 지국은 많은 경우 한민당 지부와 겹쳤으며, 1950년대 언론의 각종 필화 사건은 명목뿐인 알량한 언론의 자유조차 이승만 독재 정권에 의해서 나폭하게 유린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박정희 정권기에는 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다시피 하였고, 전두환 정권기에는 각 신문사가 자발적으로 권력에 영합하였으며, 또 거대 언론자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의 언론 환경이라면 제대로 된 현대사 연구를 위해서는 신문 기사 한 조각을 읽을 때에도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 역사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곳, 우리들의 몫이다 (42~44쪽)
루이스 애거시(Louis Agassiz)의 사례
...
박정희가 집권했던 시기에 이룩한 경제 성장도 역사적 사실이고, 그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거나 피해를 입었으며,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킨 것도 역사적 사실이지만 양극단의 평가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고, 그의 이미지를 이용한 마케팅이나 소비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모적 논란이 아니라 그런 모순과 역설을 가능케 한 한국 현대사의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 아니겠는가?
20세기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극단의 시대'였고, 그 시대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근대의 박물관'이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순과 역설을 직시하려는 용기와 그 역사에 대해서 비판의 끈을 늦추지 않되 그러면서도 품이 넉넉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리라.


## 6강 : 한국 가족제도와 '가장의 반란' (전경수)
* 가족 현상을 보는 눈, '혼인의 문제'와 '계승의 문제' (105~106쪽)
가족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대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가지는 거주율(Rule of Residence:혼인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혈통율(Rule of Descent:계승의 문제)이다. 삶이라는 실천의 차원에서 볼 때, 전자가 후자에 비해서 우선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까닭은 전자는 하루하루를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의 문제이고, 후자는 그런 일상의 차원을 떠나서 선후와 집단을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창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족에 존재했던 서류부가제-서옥제의 현상은 당시 혼인과 관련된 문제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혼인 이후에 새로이 탄생한 부부가 사는 곳을 규정한 설명이다. 즉 사위가 자기 부인의 집에 머문다는 것인데...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며느리가 남편의 집에 사는' 중국의 한족 방식과는 사뭇 다른 현상임을 지적한 기록이다.

* 시가(媤家)와 媤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106~108쪽 )
현대의 한국 사람들이 결혼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일상적인 용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장가간다', 또 다른 하나는 '시집간다'이다.
...'丈家'는 한국식 한자이고, '媤집'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한국식 한자의 '媤'와 한글인 '집'이 결합된 단어이다... 시가와 시집은 어떤 의미상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을까? 장가라는 단어는 한자문화권에서는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서, 그 자체가 결혼을 의미한다. '媤家'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결혼한 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부모가 사는 집'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시가간다'라는 용례들은 그 자체로는 결혼한다는 의미로 통용될 수가 없다. 이러한 정황을 참작해서 결혼한다는 의미로 한자와 한글의 결합으로 조어된 것이 '시집간다'라고 생각한다.
'장가간다'와 '시집간다'가 시계열상의 선후로 등장하게 된 것이 문화변동의 문제인 듯하다. 전자는 위지동이전에서 그린 서류부가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후자는 중국인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친영'(親迎: 중국 한족의 혼례과정에서 혼례날 신라이 신부 집을 방문하여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절차를 말함)에 수반되어 후속적으로 이어지는 절차와 관련된 문제이다. 즉, '시집간다'는 풍속은 '주자가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성리학의 예법에서 비롯된 조선후기 삶의 표현인 것이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된다. 거주율에 있어서 처거제(uxorilocality)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되면, 즉 신혼부부가 부인의 본가에 거주지를 정하고 살림을 하고 자녀를 키우는 경우, 그 연장선상에서 거주율의 영향을 받은 혈통율이 모계제(matrilinearity)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 처거제-모계제 세트의 대응짝이 부거제(virilocality)-부계제(patrilinearity)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후기 이후 한국사회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역사적인 문헌 이래 조선 전기까지의 삶의 모습은 처거제-부계제를 유지한 것이 개략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친척 관계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할 경우, "처가로 장가를 든 선조가 이 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처거제-부계제의 원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 과거 어느 시점에 남자의 반란이 있었다 (108~109쪽 )
거주율과 혈통율을 결합할 경우(처거제-부계제), 혼인에 있어서는 남자의 뿌리를 뽑아서 여자의 거주지로 이전하고, 가계승의 측면에서는 남자 쪽을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거주율에서는 여자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고, 혈통율에서는 남자가 유리하도록 하는 균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라는 현상의 진화선상에서 생각한다면, 처거제-모계제를 유지하는 가족제의 시작 이래로 어떤 시점에서 '남자의 반란'이 있었던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다.
처거제-부계제의 세트를 운영하는 사회에서는 중간과정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혼인 당시에 처거제로 거주율을 정했는데, 후일 적절한 시기에 부계제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가의 이주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 어떤 계기로 부인의 집에서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던 남편이 최소한의 가족원을 대동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본가로 거주지를 이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 시집살이에 대한 강력한 반발은 부거제의 후폭풍 (109~111쪽)
부계제를 시행하는 사회에서 거주율이 처거제에서 부거제로 전환됨으로써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가 가부장권이라는 것이다. 부계제이기 때문에 가부장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사회현상의 역동성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견해이다.
가부장은 거주율도 남자 쪽, 혈통율도 남자 쪽에 집중됨으로써 파생된 현상이다... 남자 쪽에 곱배기로 무게가 실리면서 엑스트라로 불어나는 부분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불거진 것이 가부장이라는 현상이고, 이것이 누리는 권력의 문제를 가부장권이라고 부른다. 즉 불균형의 문제가 극대화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가부장은 가족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게 됨과 아울러 그에 대한 책임도 짊어지기 마련이다.
가부장이라는 현상도 조선후기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문제를 걱정했던 과거(조선전기 이전) 한국인들은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처거제-부계제를 선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 들어 진행되고 있는 시집살이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 현상들은 처거제에서 부거제로 전환된 이후에 성립된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후폭풍으로 보인다.

* '가장 개념'이 사라지기 직전에 발생하는 '가장의 반란' (113~114쪽)
전근대의 가부장은 근대화 이후 가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함께 살아가는 살림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가부장의 모습은 가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장의 개념은 남아 있는 핵가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영향으로 생겨난 핵가족 속에서 진행되는 부거제-부계제의 궁극적인 모순, 즉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가족 내의 모순은 여러가지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또한 변화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서 가장 중심의 자살로 귀결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불균형의 삶이 가중시키는 고통을 자살로 해결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현실이다. 가장이 저지르는 가장 자신에 대한 반란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반란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살일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개념이 사라지기 직전에 발생하는 '가장의 반란'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인류학자의 실천적인 대안은 균형 추구의 실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편에서는 '가장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 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편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한다.
... 이제 고령사외의 노인문제가 당장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몫으로 기다리고 있다.
장기적인 대안은 자녀의 다산과 거주율의 처거제를 회복하는 일일 수 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근본적으로 여성의 몫이다. 그것이 시행 가능하려면 여건 조성에 무제한적인 배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
여성 쪽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다소 무리인 제도들을 인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인 남자들이 시체로 쌓여가는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가족 해체의 근원적인 문제가 여기에 도사리고 있음을 헤아린다면, 처거제를 시행했던 고구려와 고려 사람들의 지혜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 13강 모든 단단한 것들은 녹아 사라진다 ( 임현진 )
* 정보, 지식, 녹색, 양자 사회를 압도하는 자본주의 사회 (217~218쪽)
인류가 자본주의 이후 포스트모던으로 상징화되는 정보사회, 지식사회, 녹색사회, 양자사회에 들어섰다 해도 역시 그 실체가 자본주의라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
세계화는 얼굴을 가린 신종 발전 이데올로기로 이런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하고 있다. "국가를 개방하고 시장에 의존하라. 그러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최근 선,후진국 국가를 불문하고 신자유주의를 선호하는 것도 생산과 투자를 국가 개입이 아닌 시장 자체에 맡기려는 시도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보호막으로서 민주주의가 참여와 평등보다는 경쟁과 축적의 이념으로 변색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지구시대의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와 시장경제이 의미로 협애화하고 있다.
...
그러나 국가가 왜곡된 자원 배분을 시정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결과적으로 경쟁이 과열돼 분배 구조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국가들 간의, 혹은 한 국가 안에서 나타나는 빈부격차의 심화나 양극화의 문제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기인하고 있다.

* 메가트렌드 속에 숨어있는 세계화의 실상과 허상 (221~222쪽)
조금 찬찬히 살펴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 선진국의 위치에 있는 중심부 강자의 논리이다. 이는 그 배면에 깔려 있는 자유무역주의에 근간한 개방화, 자유화, 민영화를 통해 시장의 원리를 강화하려는 선진국들의 의도에서 잘 입증된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계속 추진되어온 기술라운드(TR, Technology Round), 그린라운드(GR, Green Round), 블루라운드(BR, Blue Round), 경쟁라운드(CR, Competition Round) 같은 메가라운드도 따지고 보면 기술 이전, 환경보호, 근로 조건 혹은 공정 경쟁을 내세워 후발개도국을 견제하려는 중심부의 고도의 계산이 은밀히 깔려있다.

* 올리브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한 발돋움은 어떻게 할 것인가 (222~223쪽)
그러므로 세계화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처럼 신흥공업국에는 병 주고 약 주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이 추구한 세계화가 한국의 낙후된 시스템을 개조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 부문의 성급한 시장 개방으로 인해 19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세계화에는 명암이 교차할 뿐만 아니라 득실이 병존한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IMF 방식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비록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노무현 정권 들어 악화되었던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세계화는 계급, 계층, 집단, 부문, 개인 사이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는 '하나는 부자, 다른 하나는 빈자'인 '두 개의 국민'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전문화된 지식을 보유하고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능력이 잇는 사람들만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하며, 나머지는 세계화의 과실로부터 배제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부유층은 마음껏 쇼핑을 즐기는 반면 빈곤층은 실업 상태에서 마약과 범죄에 빠져든다는 미국의 예를 든 테드 슈레커(Ted Schrecker)의 고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국경 없는 동일 세계에 살면서도 하나의 도시에 두 개의 국민이 성벽을 쌓고 사는 꼴이 된다.
...
지구촌이라는 미사여구 뒤에는 거대 초국적기업에 의해 장악된 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단일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돈은 조국을 모른다"는 말처럼 이 초국적 기업들은 전략적 제휴를 통해 이윤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비집고 다니면서 모국과 무관하게 정치,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국적기업에 의한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문화, 쇼핑, 노동, 서비스, 금융 지배가 이뤄지는 것이, 바네트와 카바나가 예견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세계 질서다.
이렇듯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앞선 자'를 더욱 살지게 하여 '뒤진 자'와의 격차를 벌려 놓는 방식으로 국제적, 국내적 재계층화를 가져혼다. 즉 세계화는 '20대 80'이라는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약육강식의 과정이기도 하다.

* 세계화, 블록화, 지방화 이 세 흐름을 제대로 읽어 내라 (237~238쪽)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국경이 사라지는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경제적 역할은 "번창하는 기업들의 수익성을 증가시키거나 자국 국민의 전세계에 걸친 소유물을 확대시키도록 하는 것보다는 자국 국민들이 세계 경제에 기여하는 가치를 제고시켜 줌으로써 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계화 국면에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는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나 대기업의 경쟁력이라기보다 일부 국민만이 경쟁력이 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국민 내부의 간격과 균열은 더욱 벌어질 수 있다.

 

※ 블로거의 밑줄긋기
http://pljh01.blog.me/40122390535 (곰말나루님)

※ 명랑만화의 완.소.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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