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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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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달고 보니까 넘 커다란 이름이네요 ^^; 행여 고래 등 사이에 끼인 새우가 되지 않기를 ㅎㅎ 연암은 고미숙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다산은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에서 삘 받았슴다. 잼난 놀이터가 되었으면... ^^
by 명랑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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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00:03

제가 최근에 읽었던 책이 신영복님이 쓰신 '강의'입니다. 시쳇말을 빌려 '완.소.북'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책에서 그 동안 모르거나 잘못 알았던 동양 고전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넓혀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묵자에 대한 글 일부입니다.(387-388쪽)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글이 있습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묵비사염'의 원전입니다. 바로 묵자의 소염론입니다.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其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이 물드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所染)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染當)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자는 임금과 제후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유許由와 백양伯陽에게 물들어 어진 정치를 한 순舜임금과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에게 물든 제환공齊桓公을 선정善政의 예로 들고, 반대로 간신 추치에게 잘못 물든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장유삭長柳朔과 왕성王슬에게 잘못 물든 범길야范吉射를 폭정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 문화론이 됩니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술국에서는 맏아들을 낳으면 잡아먹으면서 태어날 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 하고, 할아버지가 죽으면 할머니를 져다 버리면서 귀신의 아내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한다든가, 또 담인국에서와 같이 부모가 죽으면 시체의 살을 발라내고 뼈만 묻어야 효자라고 하는 풍습도 나라 전체가 잘못 물든 예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신영복, 강의, 돌베개 )


사람은 살면서 자신이 만나는 것, 배우는 것, 속한 것 등에 의해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게 되면서 인간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자신을 물들이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해서 물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 좋은 습관을 얘기합니다.
청소년 사역을 주로 하는 홍민기 목사님이 우리나라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택가까지 유흥업소들이 들어와 있는 환경과 어른들은 온갖 나쁜 짓을 보여 주면서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해라, 올바른 습관을 가져라 라고 얘기하니까요. 아이들이 좋게 물들여지는 게 오히려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좋은 것은 말로써 누군가를 물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는 모습이나 행동을 주로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세례' 또는 '침례'는 영어로 Baptism입니다. 이 헬라어 어원을 찾아보니까 아래와 같네요. ( 좀더 자세한 것은 http://www.hope-ind.com/Elpis/Greek/concise/beta_dic.htm )

bavptw [밥토-] bapto (동)
물에 잠그다, 즉 흐르는 물에 완전히 담그다, 신약에서 한정된 혹은 특별한 의미로만 사용, 즉 문자적으로(신체의 일부) 물에 ‘적시다’,(염색처럼)‘착색하다’, 잠그다

재미있게도 여기에 염색의 뜻이 있습니다. 색깔이 변하는 거지요. 물론 세례는 죄를 씻어 내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는 죄를 덮는 것, 흰색으로 염색(탈색이라고 해야 하나? ^^;;)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것이 예수를 믿었을 때 얻는 구원의 즉각적인 모습이라면, 예수님이 보여 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 가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조금씩 물드는 것은 구원의 점진성 또는 성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것에 물들게 하는 임무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백성들이 많이 칭찬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사도행전 2:42~47). 그리고 안티오키아라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됩니다(사도행전 11:26).

현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 비율은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슨 색깔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을까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백성들의 칭송과는 좀 거리가 있겠죠. 이것은 나쁜 점은 쉽게 드러나고 좋은 점은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분들의 모습이 더 쉽게 사람들의 눈에 띄는데 그 모습이 별로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최근에 방송에서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고발 프로그램을 자주 접합니다. 주로 큰 이슈는 교회 세습과 몇몇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재산이나 한 달에 쓰는 돈, 부도덕성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토론 프로그램에서 기독교를 변호하기 나온 분들이 '일반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면 태안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와 같은 얘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그냥 둘러 가는 모습입니다. 사실 문제를 일으킨 목사님들의 모습이 변화하지 않으면 거기에 나온 패널들은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겁니다. ^^;; 결국 논의는 빙글빙글 돌고 돌아 '서로에 대한 답답함'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번 이명박 정부의 코드를 나타내는 말이 '고소영 S 라인'이었습니다. 이 중에 들어 있는 '소망교회'의 앞 글자가 보여 주듯 (보수적인) 기독교의 지지를 받고 있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각이나 청와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물들어 가야 하는'그리스도 제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야기하는 주제 중의 하나인 '고아', '과부', '이방인'을 돌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본주의의 단점 중의 하나인 '극단적 경쟁'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라고 합니다. 균형을 이루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리더가 순결하기만 하고 지혜(옳은 판단력)가 없다면 그를 세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겁니다. 미국과의 관계만이 최고 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쇠고기 협상을 진행한다든가,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는 결국 우리 나라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판단력 부족의 순진한 외교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순결 없는 지혜는 자신(다른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만을 쫓고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게 될 수 있겠네요. 왜냐하면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경제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종부세 완화 시도와 같은 것은 상위 2% 정도의 사람들에게는 좋지만, 집없는 약 50%의 사람들에게 부동산 가격 인상의 요인이 되면 잠재적인 집값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물가의 마법'(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7/2008071701424.html)이라는 기사에서 '집값 안정'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얘기합니다.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를 증가시켜 주택에 대한 가수요를 줄이고, 종부세와 같은 세금을 가지고 정부가 제공하는 장기 전세나, 임대 주택을 늘려서 서민들이 집값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순결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되어 장기적으로 집값이 안정되고 하락하면 세금도 줄겠지요.

'실용'이란 무엇일까요? 정직(깨끗함)을 기본으로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능력'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부정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첫 내각을 구성할 때 이전 정부보다 부동산이나 논문 표절 등의 도덕성 기준에서 후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대통령 자신이 자녀들의 위장 취업으로 세금을 내지 않다가 문제가 되니까 돈을 냄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행동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장로님의 그런 모습은 교회를 좋지 않은 색깔로 물들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는 '십계명'에 덧붙여진 아주 중요한 계명이 있다고 하면서 열한 번째 계명으로 '들키지 말라'라고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생각납니다. 한편으론 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죠 ^^;;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하나의 규칙을 업신여기면 모든 규칙을 업신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규칙은 하나의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자기 억제를 깨뜨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제가 자주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태 복음 23:2,3)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준 율법의 본 뜻은 잃어버리고 형식에 치우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라면 아마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든 것을 부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말은 지키라고 합니다. 많이 곱씹어 볼 만한 말입니다.

이번에 정권이 바뀌면서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모든 것을 '10년 전'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클린턴 이후 공화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나온 얘기가 ABC(Anything But Clinton)이었습니다 - 이를 빗대어 현정부의 정책을 ABR(Anything But Roh)이라고 합니다. 클린턴 정부가 한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8년이 지난 지금 부시 행정부는 외교 정책 등에서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이름만 조금 바꾸어 사용하는 것도 꽤 있다고 합니다.
이명박 정부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미 한 번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외교 정책을 참여 정부와 완전히 바꾸려고 하다가 미국과 일본에게는 이용만 당하는 것 같고, 중국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악화되는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나타났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중용에 대한 연구에서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성품을 다한다(盡其性)는 제 몸을 닦아 지극한 선에 이름이요, 인간의 성품을 다한다(盡人性)는 남에게 봉사하며 지극한 선에 이른다 함이요, 만물의 성품을 다한다(盡物之性)는 위와 아래, 초목·조수(새나 짐승) 등 모든 것에 다 잘한다"라는 뜻이라 해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일마다 모두 지극히 진실하며(至眞至實),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며(可踐可履), 붙잡고 접촉할 수가 있으며(有摸有捉), 과장도 없고 허탄함도 없다(無誇無誕)"라는 실용과 실천의 세계가 가능해진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마음이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더욱더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고 말하셨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에는 'God悲絲染'과 'God喜絲染' 중 어느 것이 남게 될까요?


p.s. 교회 & 정치
☞ http://ya-n-ds.tistory.com/13

p.s.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도종환이 보내는 '시인의 엽서']<13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218000907

※ '생활의발견' 다른 글 보기
http://ya-n-ds.tistory.com/tag/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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